“나는 부모가 아니라 감시자였다. 아이를 살린 건, 인정, 존중, 지지, 칭찬이었다.” 이유남 교장선생님이 쓴 책 <엄마 반성문>의 일부이다.
그랬다. 하마터면 아이는 죽을 뻔했다. 학창 시절 이후 ‘모범’으로 살아온 엄마는 늘 성취지향적이었다. 엄마의 자녀 교육 지침은 3가지였다. 성적, 상장, 임원. 공부도 잘하고 상도 많이 받고 반장 등 리더가 되는 것이었다. 엄마가 교사이기에 자기 반에서 가장 잘하는 아이들이 모델이었다. 그걸 은연중에 자기 아이에게 강요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결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언젠가 아이 나름 자기 삶을 찾아가기 마련. 고3 아들이 자퇴 선언을 하고 뒤이어 딸도 자퇴하자 엄마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승승장구하던 내 인생도 여기서 끝’이란 생각에 앞이 캄캄했다. 내키진 않았지만 아이들의 자퇴 선언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가 진짜 자살할 것 같았다. 실제로 오늘날 한국에서는 10대 청소년이 1년에 300명 안팎이 자살한다. 그러니 엄마도 한 걸음 물러날 수밖에.
그 뒤 엄마는 자신의 삶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난 아이들의 원수였다. 내가 슈퍼맘이 되면 될수록 우리 아이들은 괴물로 변해갔다.” 통렬한 반성이다. 그랬다. 한국 현실에서 교장이 되기까지 얼마나 열심히 해야 했을까? 직장에서는 직장대로 완벽해야 했고, 집에 오면 오자마자 아이들 알림장과 문제집 검사부터 했다. 또 텔레비전에 손을 대보아 얼마나 뜨거운지 확인하고 시청 시간마저 통제했다. 그 결과 아이들은 공부도 잘하고 늘 칭찬받았다. ‘엄친아’의 표상이었다. 엄마는 속으로 ‘내가 아이를 잘 키우고 있구나, 나는 슈퍼맘이야’ 이렇게 생각했다. 아이들만이 아니라 엄마도 1등 강박증에 빠졌다.
그러나 길지 않은 인생, 굳이 그렇게 살지 않아도 좋지 않은가? “제가 만약에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진짜 이 아이들에게 좀 선택권을 많이 주고 싶어요.”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은 제가 생각해서 시켰거든요. 그러니까 한 번도 뭐 해 보고 싶니? 어떤 게 좋으니, 물어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이 아이들한테 칭찬해 준 적이 없어요, 제가. 그런 것들이 필요한데, 그걸 못해 줬어요.” 그렇다. 선택과 칭찬, 자유와 존중, 경청과 소통, 신뢰와 지지가 아이를 살린다. 그래야 부모도 산다.
물론 이걸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말이 쉽지, 어디 실천이 쉽나? 바로 이것이 우리의 평균 의식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여기저기 학원에 보내고 시험지 과외도 시키고, 요즘 같으면 각종 체험 학습이나 특기적성 활동 등 남들이 좋다는 걸 모두 해주고 싶어 한다. 이렇게 우리는 교육을 투자 내지 소비 개념으로 생각한다. 부모가 아이의 교육을 위해 돈을 충분히 쓰면 나중에 그만큼 두툼한 보상을 받는다는 논리. 아니면 나중의 보상 같은 거 생각지 말고 그저 아이에게 좋은 걸 원 없이 모두 해준다는 논리. 모두 ‘옆집 아줌마 따라 하기’다.
그러나 교육을 이런 식으로 보는 한, 우리는 헛발질을 한다. 그 결과는? 그렇게 우리는 고비용 저효율의 과잉학력 사회를 만들었고, 무기력한 아이들을 양산했다. 사상 최고의 청년실업 앞에 부모도 절망한다. 취업한 아이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 입시 강박증 속에 부모나 교사는 ‘괴물’이 되었고 사회 전체는 ‘지옥’이 됐다. 2015년에 논란이 된, 엄마를 잡아먹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담긴 ‘잔혹 동시’도 이 맥락에서 나왔다.
교육은 투자도, 소비도 아니고 ‘생활’이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사는 과정일 뿐. 그저 현재를 행복하게 살면 된다. 이게 핵심인 걸 잘 모른다. 다만 어른들이 먼저 살았기에 이미 경험하고 느낀 걸 아이들과 나누면서, 모름지기 사람답게 살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선이면 족하다. 성취지향적으로 살다 보면 놓치는 것도 과정지향적으로 살면 보인다. 이유남 선생은 아이들의 자퇴 선언을 억지로라도 수용함으로써 아이의 생명을 살렸을 뿐 아니라 잠재력도 살려냈다. 동시에 아이들은 자기 내면을 억압하지 않고 표현함으로써, 또 주체적으로 생활함으로써 엄마를 제대로 살려냈다. 엄마는 아이를 구하고 아이는 엄마를 구했다. 이렇게 제대로 된 교육은 ‘서로 살림’의 과정이다. 이런 면에서 (인간) 교육이 제대로 되려면 (기존) 교육을 벗어나야 한다. 부모와 교사가 거듭나야 아이도 살고 교육도 산다. 프레임을 바꾸면 새 길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