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없이 민주주의 없다

오수경 자유기고가

요즘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놀이가 있다. ‘개시건방진’ 표정으로 사진 찍기. ‘인권변호사’로 알려진 어느 변호사가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한 신지예 서울시장 녹색당 후보의 벽보 사진에 관해 ‘개시건방진’ ‘나도 찢어버리고 싶은 벽보’ 등의 거친 표현이 담긴 글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시한 것이 발단이다. 비판이 거세지자 그는 사과했다.

[시선]페미니즘 없이 민주주의 없다

우선 ‘개시건방진’이라는 단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주로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언행을 평가할 때 쓴다. 신지예 후보는 정당한 절차를 거쳐 후보에 등록한 ‘공인’이다. 변호사의 사회적 지위가 어찌 되는지 잘 모르지만, 그가 막말을 해도 되는 대상은 아니란 말이다. 그는 왜 그랬을까? 그에게 신지예 후보가 아랫사람이라도 되는 걸까? 아니면 1990년생, 페미니스트, 여성 후보의 ‘자신감 있는’ 표정은 중년 남성에게 ‘개시건방진’ 표정으로 자동번역이라도 되는 걸까? 그다음 주목할 단어는 ‘찢어버리고 싶은 벽보’ 앞에 붙은 ‘나도’이다. 단지 그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란 뜻이다.

과연 ‘찢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실천한 사람들이 있었다. 신지예 후보의 선거 벽보와 현수막이 훼손된 것이다. 물론 후보의 홍보물이 훼손된 경우는 선거 때마다 있었다. 그러나 신지예 후보의 경우는 다르다. 유난히 페미니스트라는 글자 주변, 후보 얼굴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여성과 성소수자 등 그동안 사회적으로 배제되었던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이 되겠다고 출마한 젊은 여성 정치인을 향한 편견과 혐오가 ‘개시건방진’이라는 말과 ‘벽보 훼손’이라는 행위의 동력이 된 것이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임한 대통령을 가진 2018년의 한국 사회에서 말이다.

한국 사회의 정치는 명백히 ‘중년 남성’의 것이다. 이번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 성비만 봐도 그렇다. 더불어민주당이 발표한 17개 전국 시·도지사 후보에 여성은 없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여섯 번의 지방선거를 치르는 동안 광역단체장으로 선출된 여성도 없다. 선거 때마다 여성이 불려나오기는 한다. 후보의 아내와 딸, 혹은 꽃으로서 말이다. 3선에 도전하는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딸의 유세 일정을 소개하며 “강원 안구 복지 타임”이라고 표현했다. 김문수 자유한국당 서울시장 후보는 도시를 “매일 씻고 다듬고 피트니스도 해야 하는” 여성에 비유했다. 여성이 정치 생태계에 존재하는 ‘그림’이란, 고작 이 정도인 것이다. ‘중년 남성’ 정치를 위해 여성을 필요로 하지만, 생각하고 말하고 설치는 주체적 여성은 혐오하며 배제하는 정치 말이다.

선거는 이기는 게 중요하지만 어떤 사회를 지향할 것인가에 관해 상상력을 펼쳐볼 기회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스트’를 자임한 젊은 여성 후보를 향한 마타도어나 아내와 딸, 혹은 꽃으로서 여성을 아무 문제의식 없이 활용하는 정치는 분명 퇴행이다. 그런 구태 정치를 박살내기 위해 젊은 여성 후보들이 나섰다.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는 정치가 아니다. ‘Girls Can Do Anything’이라는 구호는 정치라고 예외일 수 없다. ‘페미니즘 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말은 우리 사회의 보편 상식이 되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활약하는 젊은 여성 정치인들의 의미에 관해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은 이렇게 응원했다. “최소한 우리 모두가 역사적인 첫걸음을 떼었다. 여자라는 이름으로,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짓밟히고 차별받는 시대를 종식시키겠다는 선언의 첫걸음을 떼었다는 기록을 남겼으면 좋겠고, 우리 국민들과 함께 그것을 공감하는 인식의 확산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전국에서 분투하고 있을 여성 정치인들의 선언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비로소 이렇게 멋있는 여성 정치인들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이번 선거에서 거의 유일하게 만나는 ‘사회적 상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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