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 내가 교토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할 당시 재일코리안은 일반기업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했고 다행히 2차 시험에 합격해 회계감사 실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적성이 맞지 않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회계사 길을 포기했다. 주변 선배들과 상의한 끝에 사법시험을 치기로 했다. 삶의 진로를 경제학에서 법학으로 확 바꾼 것이다. 처음 펼쳐본 형법 교과서에는 ‘어떠한 근거로 국가가 개인에게 형벌을 가할 수 있는가’라는 철학적인 물음이 있었다. 경제학부에서 배워온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제기에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인간은 모두가 자유의지를 가진 이성적 존재’라는 것이 18세기 말 유럽 형법학자(철학자)들의 대전제였다. 인간은 잘잘못을 판단하는 능력과 그 판단에 따른 행동을 적절히 제어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성적인 인간이 윤리적으로 금지된 일을 저질렀다면 비난받아 마땅하고 이런 반인륜적 행위의 대가가 형벌이라고 했다. 자신의 행위가 원인이고 형벌은 그 결과라는 인과응보 관념이다.
이러한 보복감정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전부터 아주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 있다. 지금도 형사사건 피해자들은 가해자인 피고인에게 엄벌을 내려달라고 검사와 판사에게 하나같이 요구한다. 이렇듯 현실에서는 복수의 정당성이 설득력을 갖고 인간과 사회를 지배한다. 전 세계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폭력, 군사분쟁, 정쟁 등은 물론 작은 싸움의 배경에도 이런 생각이 있다.
그러다 19세기 유럽에서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농촌사회가 무너지고 실업자가 증가하고 빈부격차는 확대됐다. 사회모순이 심각해지면서 가난을 견디지 못해 빵을 훔치는 장발장과 같은 어른, 도둑질을 하면서 살아나가는 올리버 트위스트 같은 소년이 늘어났다. 이는 환경의 변화에 의해서 증가한 범죄로 ‘인간은 모두 자유 의지가 있는 이성적 존재’라는 기존의 생각이 설득력을 잃게 된 것이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전통적인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형법학자(철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한 때가 19세기 후반이다. 범죄 행위의 구체적인 배경을 조사해보면 장발장이나 올리버 트위스트처럼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에 어느 학자는 범죄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유전적 기질, 요즘 식으로 말하면 유전자(DNA)에 의해 필연적으로 태어난다고 했고, 또 어떤 학자는 인간을 둘러싼 사회조건이 범죄를 낳는다고 했다.
새로운 생각은 기존의 전제인 ‘인간은 잘잘못을 판단하는 능력과 그 판단에 의한 행동을 적절히 제어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수정하고 부정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이상적 인간상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허구라는 것이다. 새로운 생각에 따르면 형벌의 목적은 단순히 복수나 보복이어서는 안된다. 교도소는 범죄자를 회생시키는 교육시설이어야 하고, 이들을 일정한 기간 가두는 것도 보복의 의미가 아닌 사회를 방어하는 불가피한 조치가 된다.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출판,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의 <이중나선 구조> 발표 등 자연과학 진보와 사회과학 발전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단순한 보복으로는 범죄가 줄지 않고 오히려 복수의 악순환으로 범죄가 증가할 뿐이다. 범죄를 줄이려면 환경을 바꾸고 모두에게 양질의 교육을 해야 한다.
대학 시절 괴테에 빠졌었다. 그의 명언 가운데 “모든 것을 안다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말이 있다. 요새도 결혼하는 신랑신부에게 덕담으로 해주고 있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런 방향으로 가는 것 외에는 인간의 미래가 없다.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도 우리 조상들은 말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