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나는 4·3 발발 70주년 관련 행사 때문에 제주에 있었다. 공항에서 생활정보지를 집었는데, 어느 시인이 쓴 ‘거리의 복면가왕’이라는 글이 놀라웠다. 올레꾼의 복면(覆面) 복장을 비판하는 글인데, 마지막 부분이다.
“스페인에서는 마스크를 쓰면 나병 환자 취급을 한다고 들었다. 오스트리아는 공공장소에서 부르카를 비롯하여 얼굴을 가리는 복장을 법으로 금지한다. 아무리 제 잘난 맛에 산다지만 보는 이들이 혐오감을 느낀다면 삼가는 것이 미덕 아닐까.”(‘교차로’ 6월25일자, 5569호).
일단, 위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유럽에서 한센병 환자를 경원시하는 문화는 구약성서의 영향 때문이고, 복면 금지는 KKK단처럼 약자를 린치하는 집단을 단속하기 위해서였다. 부르카 금지는 보는 사람의 혐오감 때문이 아니라 착용 여부에 대한 여성의 선택권을 박탈하는 게 인권의 보편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나도 얼굴을 가린 이들을 보면 답답함을 느끼지만, “복면이 싫다”는 판단 기준이 왜 유럽 사례여야 할까. ‘우리는’ 이슬람을 얼마나 아는가.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들이’ 핍박받는 이들이든 악당이든 한국인은 서구의 시각(인종주의)을 통해 그들을 본다.
예멘은 2015년 시작된 내전으로 인구의 70%인 2000만명이 식량 부족 상태이며 자국을 떠난 이들은 19만명에 이른다. 이들 중 500여명이 제주에 왔다. 이 글에서 난민에 관한 근본적인 논쟁이나 구체적인 대책을 논할 수는 없다. 다만,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고 외쳤던 이들이 “난민보다 더 어려운 우리 국민이 있다”고 말할 때, 일부 여성이 “예멘 남성으로 인한 한국 여성의 성폭력 공포”를 주장하며 “재사회화” 대책(?)을 제시하는 현실이 당황스럽다. 타인의 정체에 대한 확신에 찬 규정과 머릿속의 ‘처리’ 방식까지 마음껏 발화하는 것. 이것이 혐오다.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다.” 근대 초기에 등장한 대표적인 페미니즘 슬로건이다. ‘여성’과 ‘국가’. 둘 중 하나의 정체성만으로는 여성의 현실을 해석할 수 없다. 여성은 젠더와 민족, 모두로부터 억압받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넘는 횡단의 정치가 필요한 이유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운동이나 ‘적국’인 팔레스타인 여성과 이스라엘 여성의 평화 연대가 좋은 예이다.
문화인류학자 김현미는 난민 중에서 여성과 어린이만 받고 남성 난민은 재사회화시키자는 주장은 여성 연대와 무관하다고 지적한다. 뿐만 아니라 초국적 남성 지배 문화를 드러내지 못하며, 무엇보다 한국 남성의 문제를 은폐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이미 다인종 국가다. 홍세화는 묻는다. 백인과의 관계는 ‘글로벌 라이프’, 그렇지 않은 경우는 ‘다문화’인가?
이주민 여성운동가인 정혜실은 “어떻게 페미니즘을 앞세워서 또 다른 소수자인 난민을 억압할 수 있는가. 분노하다 못해 절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페미니즘 일각의 성 소수자 혐오가 난민 혐오로 넘어왔다고 본다.
난민 이슈가 중요한 이유는 수용 여부 자체‘보다’, 한국 사회 내부의 차별과 순혈주의 망상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난민 반대”는 자본주의의 절대 지배 속에서 누가 더 약자이고 더 고통받는가를 경쟁하는 비극의 정치일 뿐이다. 난민과 성폭력을 연결시키는 사고는 무지 혹은 의도된 오식(誤識)이다. 1970년대부터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서구가 비서구 사회의 야만성을 부각하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성의 ‘열악한’ 인권 이미지를 활용해왔음을 강력하게 비판해왔다. ‘서구 선진국’에도 여성에 대한 폭력은 넘쳐난다. 양상이 다를 뿐이다.
성폭력은 오래된 범죄다. 전 세계적으로 가해자의 70~80%가 아는 사람이며, 그들의 30%가 친·인척(가족)이다. 범죄 장소도 가해자나 피해자의 집이 80%다. 피살자가 여성인 경우, 범인의 60% 이상이 남편이나 파트너다. 즉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제1의 세력은 (난민이 아니라) 가까운 남성들이다. 물론 모든 남성이 가해자도 아니고 모든 여성이 피해자도 아니다. 문제는 젠더가 다른 사회적 구조와 결합하여 성폭력 공포가 조성되는 방식이다. 권력은 무엇이 가해이고 아닌지를 결정하는 시스템이지, 페니스가 아니다. 흑인, 난민, 노숙인은 쉽게 가해자로 간주된다. 현실은 다르다. 미투 운동에서 보았듯이 예술, 학문, 종교계의 성폭력이 더 교묘하고 만연해 있다. 조직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지금 남성 주도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한국 여성 보호=난민 반대”와 “난민이 못된 한국 여성을 강간해야=난민 찬성” 입장이 싸우고 있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왜 ‘난민은 남성’으로, ‘한국인은 여성’으로 대표되는지 질문한다. 한국 남성은 한국인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가? 집단의 성별적(性別的) 재현. 이는 난민을 위협 세력, 침략자로 만드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한국 남성이 이주여성에게 자행해 온 폭력은 드러나지 않는다.
난민은 ‘우리’의 거울이다. 수용이나 혐오 등 차이에 대한 태도는 민주주의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자국민 우선? 아니, 누가 자국민인가? 도처의 양극화를 보라. 어느 사회 내부도 균질적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