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처음

김범준 | 성균관대학교 교수·물리학
[김범준의 옆집물리학]처음

2019년 새해가 밝았다. 모든 것은 처음이 있다. ‘옆집물리학’은 오늘이 처음이고, 우주는 138억년 전에 처음 시작했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만 나아간다. 비가역성이 있어, 되짚어 거꾸로 돌릴 수 없다. 누군가의 모든 처음은 다시 올 수 없는 우주적 사건이다.

[김범준의 옆집물리학]처음

올해의 처음이 꼭 사흘 전이어야 할 물리학적인 이유는 전혀 없다. 달이 기준인 음력으로는 새해까지 아직 한 달도 더 남았다. 지구는 365일을 주기로 태양 주위를 돌아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다. 사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이나 추분, 낮이 가장 긴 하지, 밤이 가장 긴 동지를 새해의 첫날로 삼는 것이 누가 봐도 결과가 같은 객관성을 추구하는 과학의 입장에서는 훨씬 더 적절하다.

1월1일 올해의 첫날, 주변의 자연을 아무리 봐도 전날과 다른 것은 딱히 없다. 하지만 춘분날에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 시계를 보며 해의 위치를 잘 살피면, 아, 오늘이 춘분이구나, 누구나 알 수 있다. 해가 떠서 질 때까지인 낮의 길이가 하루의 딱 절반인 12시간이다. 춘분이 지나면서 낮이 밤보다 길어지니, 빛이 어둠을 이기기 시작한다는 비유도 가능하다. 기독교의 부활절이 지금도 춘분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이유다. 성탄절이 12월25일로 정해진 것도 빛이 어둠을 이기기 시작하는 춘분날이 마리아의 예수 잉태일로 적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달력의 재밌는 역사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이정모의 책 <달력과 권력>을 추천한다). 수태 기간인 40주를 춘분날에 더하면 12월25일 무렵이 된다. 이처럼 특별하다 보니, 여러 문명에서 춘분을 새해의 첫날로 삼았다.

우리가 지금 이용하는 달력에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9월, 10월, 11월, 12월은 영어로는 September, October, November, December인데 이는 라틴어 숫자 7, 8, 9, 10에 해당한다. 즉 지금의 12월은 과거에 10월이었고, 마찬가지로 춘분이 들어있는 지금의 3월이 먼 과거에는 한 해의 첫 달이었다. 현재의 달력에서 2월이 다른 달보다 유달리 짧고 하필이면 2월에 윤년의 하루를 넣는 것도 마찬가지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365일을 열두 달에 30일, 31일로 적절히 나눠 넣고는 세부적인 날짜의 조정을 마지막 달이던 2월에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이용하는 달력에는 과거 흔적이 화석으로 남아있다.

시간(時間)은 말 그대로 때(時)의 사이(間)다. ‘사이’를 재려면 먼저 한 점을 찍어야 그곳을 기준으로 다음 점까지의 거리를 잴 수 있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화살 위 어디에 점을 찍어 한 해의 처음으로 정할지는, 결국 우리 앞에 살았던 사람들의 약속에 불과하다. 한 해의 처음 날짜가 임의적이라 해서 처음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물리학에서도 그렇다. 돌멩이를 손에 들고 있다가 가만히 놓으면 땅에 떨어진다. 땅에 닿을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쉽게 계산할 수 있다. 그런데 돌멩이를 처음에 아래로 던지면 더 빨리 땅에 닿고, 돌멩이를 놓은 처음 높이가 달라지면 땅에 닿는 시간은 또 달라진다.

이처럼, 땅이라는 목표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의 시간은 돌멩이의 처음 높이뿐 아니라 돌멩이의 처음 속도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물리학에서는 물체의 처음 위치와 처음 속도를 합해 초기 조건 혹은 처음 조건이라 부른다. 같은 물체가 같은 물리법칙을 따라 움직여도, 나중에 어디 있을지는 처음 조건이 결정한다. 우주의 모든 입자의 미래를 결정론적으로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상의 절대지성을, 처음 이를 상상한 과학자의 이름을 따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한다. 제아무리 뛰어난 라플라스의 악마라도, 처음 조건을 모르면 평범한 우리와 마찬가지다.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다.

올해의 첫날 새해 결심을 한 사람이 많을 거다. 나도 그랬다. 뱃살도 줄일 겸, 건강도 위할 겸, 운동을 다시 시작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피아노나 기타를 배우겠다는 (매년 반복하는) 다짐, 그리고 아내와 함께할 취미를 찾겠다는 결심도 했다. 첫날 다짐한 올해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도 처음 조건이 중요하다. 처음 위치뿐 아니라 처음 속도도 함께 들어있는 물리학의 처음 조건처럼, 올해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처음 속도가 중요한 것은 아닐까. 다짐을 실천하는 첫날 처음 속도를 갖는 방법이 있다. 내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새 다짐이 있다면 하루 전인 오늘 당장 시작하는 거다. 하루에 조금이라도 책을 읽겠다는 다짐을 오늘 했다면, 내일부터가 아니라 오늘 당장 시작하자. 체중 감량 다이어트도 내일이 아니라 당장 오늘부터 말이다. 첫날인 내일, 이미 0이 아닌 처음 속도를 갖게 된다.

외부의 영향이 없다면 현재의 운동 상태를 지속하려는 경향을 물리학에서는 관성이라고 부른다. 외부에서 건드리지 않으면(외부의 힘이 없다면), 가만히 정지해 있는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고, 일정한 속도로 직선을 따라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직선을 따라 같은 속도로 움직인다. 하루, 하루, 그리고 또 하루. 이어지는 다짐의 실천으로 생긴 관성은 습관이 되고, 몸에 밴 습관은 더 큰 관성을 가질 수도 있겠다. 아주 큰 관성을 가진 물체는 웬만한 외부의 충격이 있어도 지금까지의 운동 상태를 유지한다. 큰 관성을 갖게 된 습관은 하루나 이틀쯤의 주변의 영향으로 흔들려도 이전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어쩌다 외부의 효과로 잠시 영향을 받으면 그다음 날에 앞으로의 궤적을 약간 보정하면 될 일이다.

아침에 눈을 떠 시계를 보라. 오늘은 남아있는 내 삶의 처음이다. 내일 돌이켜보면, 오늘 하루 내가 한 모든 것은, 반복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하루 전의 과거가 된다. 시간의 화살 위에 구체적 행위로 점 찍힌 모든 처음은 소중하다. 되짚을 수 없어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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