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이’ 과정을 겪고 있는 평화읽음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의 옆집물리학]‘상전이’ 과정을 겪고 있는 평화

평화가 오고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북한을 둘러싼 국제관계가 급물살을 탔다. 북·미 정상회담도 베트남에서 다시 열렸다. 잠깐 전쟁을 멈추자는 약속에 불과한 정전협정은, 전쟁이 끝났다는 종전선언으로 이어져야 하고, 전쟁도 끝났으니 이제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는 평화협정으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서다. 하지만 우리는 정전체제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65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

[김범준의 옆집물리학]‘상전이’ 과정을 겪고 있는 평화

북한을 침공해 무력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제정신이라면 이제 어느 누구도 하지 않는다. 남한을 침공해 무력으로 점령하려는 의도를 북한이 가질 리도 없다. 엄청나게 벌어진 남북한의 경제력을 비교하면, 장기간 이어질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북한에는 없어 보인다. 힘의 비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북한이 전쟁을 시작할 이유가 딱히 없다는 점이다. 농사지을 땅이나 석유가 나는 유전이라면 모를까, 현대 산업사회의 번영을 뒷받침하는 대부분의 자산은 어디로도 옮겨갈 수 있는 무형의 자산이다. 예를 들어, 실리콘밸리의 구체적인 지리적 위치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그들이 하는 활동이 실리콘밸리를 구성한다. 어딘가를 점령하면 그곳의 경제력이 자기 것이 되는 세상은 인류 역사에서 한참 지난 먼 과거의 일이다. 어느 나라가 혹여 실리콘밸리를 힘으로 점령하면, 그곳은 한순간에 실리콘밸리가 아닌 곳이 되어버린다. 남한은 북한을 침공할 이유가 없다. 북한도 남한을 침공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둘이 합의해 무기를 내려놓으면 될 일이다. 어린아이라도 쉽게 동의할 내용이지만 합의와 해결은 쉽지 않았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암울하게 짓눌러온 문제다.

토끼만 사는 풀밭이 있다. 엄청난 번식력으로 유명한 토끼는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난다. 토끼의 증가가 무한정 계속 이어질 수는 없다. 새로 자라나는 풀에 비해 토끼가 너무 빨리 늘어나면, 먹을 것이 부족해져 토끼의 증가는 결국 멈추게 된다. 자, 이제 풀밭에 염소도 풀어놓자. 토끼가 너무 많아져도, 그리고 염소가 너무 많아져도, 토끼의 증가는 결국 멈추게 된다. 염소도 마찬가지다. 이 상황을 정성적으로 기술하는 생태 수리모형[dx/dt = x(3-x-2y), dy/dt = y(2-x-y)]을 분석하면, 전체 풀밭 생태계에서 안정적인 상황은 딱 둘이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염소만 살거나(x=0, y=2), 토끼만 살거나(x=3, y=0), 둘 중 하나가 전체 풀밭을 모두 차지하는 상황이다. 생태학에서는 이를 경쟁 배타(competitive exclusion)라 한다. 정확히 같은 자원을 놓고 어디 도망갈 곳도 없이 경쟁하는 상황에서는 둘 중 하나가 전체를 차지하는 상황이 되어야 결국 경쟁이 멈추게 된다는 얘기다. 필자는 남아메리카 원주민을 몰살시킨 스페인을 떠올렸다. 정복자는 이 상황도 평화라고 우길지 모르겠지만, 진정한 의미의 평화는 물론 아니다.

다른 곳을 침략해 사람들을 몰살하고 땅을 차지하는, 극도로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팽창을 추구하는 경제대국은 이제 세상에 없다. 사람들이 착해졌다기보다는, 여럿이 함께 공존하는 세상에서 창출되는 다양성이, 길게 보면 훨씬 더 자국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그동안의 역사적인 경험으로 어렵게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놀라운 혁신이 만들어지는 도시는 거의 예외 없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구성이 다양하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당연한 얘기다. 과거와 다른 새로운 생각 중 극히 일부만 미래의 혁신으로 이어진다. 성공한 혁신이 가능하려면 먼저 다양한 생각이 만들어져야 한다. 더 나은 미래는 공존과 다양성에서 온다.

앞서 소개한 토끼와 염소의 모형에는, 둘 중 하나만 사는 획일적인 세상 말고도 다른 종착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토끼와 염소가 공존하는 세상이다(x=1, y=1). 그런데 말이다. 둘이 함께 공존하는 이 상황은 안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약간의 변화만 생겨도, 한 종만이 살아가는 획일적인 세상, 평화라고 부르기도 멋쩍은 삭막한 세상으로 옮겨간다. 현실에서의 평화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가 아닌 여럿의 지속적인 공존이 평화의 다른 이름이라면, 평화는 쉽게 오지도, 쉽게 유지되지도 않는다. 노력을 멈추는 순간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평화는 도달한다고 저절로 유지되는 상태가 아니다. 끊임없는 조율과 양보가 필요한 지난한 과정이다.

라면을 좋아한다. 냄비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 불을 켰다. 가스레인지가 공급한 열에너지는 물의 온도를 높인다. 100도, 200도, 계속 오르는 것은 아니다. 100도에서 멈춰 더 이상 오르지 않는다. 100도에 머무는 끓는 물에 가스레인지가 공급한 열에너지는 그럼 어디로 간 걸까. 이때 공급한 열에너지(숨은열이라고 한다)는 물의 온도를 올리는 것이 아니다. 물 분자들이 서로 맺고 있는 연결의 구조를 변화시킨다. 온도계의 눈금을 통해서만 물을 보고 있는 사람은, 상전이를 일으키려면 꼭 필요한 숨은열을 보지 못한다. 온도도 안 오르는데 지금 헛고생하고 있는 것 아냐? 실망해서 가스레인지 불을 끈 사람은, 맛있는 라면을 먹을 수 없다.

진전이 더디다고, 결과가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이는 가스레인지의 불을 도중에 끈 사람을 닮았다. 이전과 다른 이후를 만들기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난 결과가 뚜렷하지 않더라도 꾸준하고 진득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이어진 숨은 노력은 숨은열이 되어 상전이를 만든다. 연결의 구조를 바꿔 세상을 바꾼다. 상전이 이후는 상전이 이전과 같지 않으리라. 평화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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