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이 달라도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읽음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의 옆집물리학]기준이 달라도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

고속도로에서 옆 차선의 차가 빠른 속도로 내 차를 앞질러 추월한다. 내가 보면 옆 차가 빨라 보이고, 옆 차의 운전자가 보면 내 차가 느려 보인다. 누구 얘기가 맞는지 다툴 일도 없다. 둘 다 맞다. 기준이 내 차인지 옆 차인지에 따라 같은 운동을 다르게 볼 뿐이다.

[김범준의 옆집물리학]기준이 달라도 똑같이 적용되는 ‘법칙’

지구에서 본 해, 해에서 본 지구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문제다. 지구에 붙박여 살아가는 우리는 매일 아침 해가 동쪽에서 떠 저녁에 서쪽으로 지는 것을 본다. 마치 해가 하루에 한 번 지구 주위를 도는 것처럼 보인다.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지구와 해를 함께 보는 이는 다르게 본다. 해가 지구 둘레를 하루에 한 번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팽이처럼 거의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자전하는 것을 본다. 겉모습이 다가 아니다. 해가 돈다, 아니다, 지구가 돈다, 둘이 다투면, 멀리서 함께 볼 일이다.

누구의 눈으로 보는지, 기준에 따라 달라지는 세상일이 있다 해서 모든 세상일이 상대적인 것은 아니다. 해가 아니라 지구가 돈다.

처음 지구의 자전을 생각해낸 사람을 떠올리면 나는 늘 경이감을 느낀다. 주변을 보라. 집채만 한 바위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엄청난 크기의 땅 전체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사실, 지구 자전에 반할 법한 일상의 경험이 많다. 앞으로 달려보라. 얼굴로 불어오는 시원한 맞바람이 땀을 식힌다. 지구가 자전하고 있다면,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도 바람이 한쪽으로 끊임없이 마주 불어 선풍기 없이 더운 여름을 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현실은 그렇지 않을까. 지구가 돌고 있다면, 내 손에서 놓은 물건이 지구 자전 반대방향으로 치우쳐 떨어지지 않고 왜 똑바로 내 발밑으로 떨어질까. 땅 전체가 움직인다고 처음 주장한 과거의 그 경이로운 사람은 당시에는 아마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으리라. 독자도 가슴에 손을 얹고 위 얘기를 고민해보라. 지구가 자전하고 있다는 것을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 아니면, 학교에서 여러 번 배워 익숙한 지식일 뿐인지 말이다. 익숙함을 앎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구와 해의 운동, 그리고 내 차에서 본 옆 차의 움직임은 고전역학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상대성이론이라 하면 누구나 아인슈타인을 떠올리지만, 사실 갈릴레오가 먼저다. 갈릴레오의 상대성과 뉴턴의 물리학만으로도 위에서 얘기한 것은 모두 설명할 수 있다. 지구가 움직여도 맞바람이 불지 않는 이유는, 마찰력으로 말미암아 지구 위의 대기도 결국은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땅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물 담긴 컵을 돌리면, 오래지 않아 컵 안 물이 컵과 함께 도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구가 자전하는데 물체가 발밑으로 수직으로 똑바로 떨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동전을 떨어뜨려 보라. 기차가 빠른 속도로 달려도 동전은 내 발밑으로 떨어진다. 동전이 내 손을 떠나는 순간, 기차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기차와 같은 처음 속도를 갖기 때문이다. 과학이 상식이 되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던 현상이 이제 당연한 상식이 된다.

갈릴레오의 상대성 원리에 따르면, 시속 100㎞로 달리는 기차에서 시속 100㎞로 야구공을 앞으로 던지면 땅 위에 멈춰 서 있는 사람은 시속 200㎞로 날아가는 야구공을 본다. 땅 위에서 본 공의 속도는 기차의 속도에 기차 안에서 본 공의 속도를 더해 얻어진다. ‘1+1=2’와 다를 바 없는 얘기다. 축구경기의 승부차기에서, 제자리에 멈춰 차지 않고 달려오다 공을 차는 선수는 갈릴레오의 상대성 원리를 이용하는 셈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이 상황이 그리 간단치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기차 안에서 빛의 속도로 공을 앞으로 던지면, 땅 위에 정지한 사람이 본 공의 속도는 얼마일까. 갈릴레오는 그 속도가 빛의 속도의 두 배라고 알려주지만, 아인슈타인의 결과는 다르다. 정지해 있는 사람도 공이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본다. ‘1+1=1’이 되는 셈이다. 믿기 어려운 놀라운 결과지만, 현실의 많은 실험은 하나같이 갈릴레오가 아닌 아인슈타인의 손을 들어준다. 물론, 물체가 빛의 속도에 육박하는 빠른 속도로 움직일 때 그렇다.

갈릴레오의 상대성이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든, 둘 모두, 누가 기준이냐에 따라 물체의 운동이 달라 보인다는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더 중요한 얘기가 있다. 바로, “누가 기준이냐에 따라 달라 보여도, 결국 똑같은 물리법칙이 적용된다”는 거다. 옷차림이 달라져도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와 같은 사람인 것처럼, 상대성이론의 진정한 의미는, 달라 보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 기준이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바로 물리법칙이다. 갈릴레오의 상대성 원리는 “등속으로 움직이는 두 관찰자가 본 운동법칙은 같다”는 것이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는 이 원리에 더해서 “등속으로 움직이는 관찰자라면, 빛의 속도는 누가 봐도 같다”를 보탠 얘기다.

물리학의 상대성이론은 ‘다름’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준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같음’에 대한 얘기다. 같은 법칙이 적용되지만, 기준이 달라지면, 각자가 보는 현상이 다르게 보일 뿐이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확연히 달라 보이는 세상일이 많다. 같은 일을 어쩜 저렇게 정반대로 볼 수 있는지, 서로 상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지구에서 해를 보면서 해가 돈다고 생각하는 사람, 해에서 지구를 보면서 지구가 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서 있는 곳을 바꿔볼 일이다. 그래도 이해가 안 되면, 멀리서 둘이 나란히 지구와 해를 함께 살필 일이다. 서로 다르게 본다고 옳고 그름을 정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세상일도 그렇다. 서 있는 곳이 달라도 여전히 유효한 보편법칙이 있다. 나는 요즘, 평화를 자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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