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드라마는 모두의 위안이 될 수 있을까

김선영 TV평론가
SBS <닥터 탐정>은 첫 번째 에피소드로 2016년 구의역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군의 사망사건을 극화했다.  SBS 제공

SBS <닥터 탐정>은 첫 번째 에피소드로 2016년 구의역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군의 사망사건을 극화했다. SBS 제공

올해 방영된 드라마 중 최고 명장면을 꼽는다면 당장 후보로 떠올릴 장면이 많다. 상반기 최고 작품이라 할 JTBC <눈이 부시게>의 ‘역대급’ 반전 장면은 너무도 유명하다. 시간능력자인 줄 알았던 혜자(김혜자)의 비밀이 밝혀지는 그 순간, 평범한 타임슬립물로 시작한 드라마는 노년 혐오가 일상이 된 고령사회 한국의 아이러니한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돼 보는 이의 가슴을 후벼 팠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쏟아진 특집 드라마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던 SBS <녹두꽃>의 서슬 퍼런 도입부는 또 어떤가. “백성에겐 쌀을, 탐관오리에겐 죽음을!”을 외치며 횃불을 치켜든 농민들의 봉기 장면은, 동학농민혁명에서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민중의 분노를 관통한 명장면이었다. KBS <동백꽃 필 무렵>의 마지막 회도 빼놓을 수 없다. 평범한 사람들이 만든 기적 같은 삶을 노래한 이 작품은 우리 사회가 가장 멸시하고 혐오했던 이들에 대한 헌정 같은 엔딩장면으로 끝까지 커다란 감동을 선사했다. 모두 올해 최고로 꼽혀도 큰 이견이 없을 만한 작품과 명장면들이다.

[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2020년 드라마는 모두의 위안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2020년의 드라마를 전망할 때 되새겨봐야 할 최고 장면으로 질문을 바꾸면 어떨까. 이달 초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한 ‘대한민국 콘텐츠 산업 2019년 결산과 2020년 전망 세미나’는 새해 키워드 중 하나로 “공평하고 올바르게”를 꼽았다. 새해 방송가 최대 이슈인 주 52시간 근무제와 표준계약서 등으로 열악한 제작환경이 개선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SBS <닥터 탐정>의 결정적 한 장면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다. 국내 드라마 최초로 산업재해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닥터 탐정>은 매회 다큐멘터리 형식의 에필로그를 붙인 독특한 포맷으로도 주목받았다. 가령 2016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의 비정규직 청년노동자 김군 사망 사건을 극화한 첫 번째 에피소드는 추모 영상과 노동환경 개선 촉구 메시지를 담은 에필로그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닥터 탐정>은 그렇게 드라마를 둘러싼 바깥, 카메라 너머의 현실을 환기한 작품이었다. 특히 눈여겨볼 장면은 15회 에필로그다. <닥터 탐정>의 오준혁 조연출이 직접 내레이션을 담당한 이 에필로그는 고 이한빛 PD에 대한 추모와 인권 사각지대에서 고생하는 방송노동자들을 향한 헌사로 채워졌다. 다른 에필로그와 달리 드라마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지만, 노동문제를 다루는 드라마가 가장 가까운 곳의 노동환경을 직시했다는 점에서 작품의 주제와 윤리의식을 잘 드러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닥터 탐정>은 근로기준법을 충실히 이행하고자 노력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드라마와 그 바깥의 현실을 일치시키려는 <닥터 탐정>의 실험은 지금 시대의 요구에 민감하게 부응한 결과이기도 하다. 요즘 시청자들은 드라마와 현실을 분리시켜 생각하지 않는다. tvN <아스달 연대기> 논란이 대표적인 사례다. 올해 초만 해도 2019년 방송가 최고의 대작이 될 것이라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작품이 최고의 실패작으로 남고만 비극은 방영 전 터진 스태프 혹사 논란에서부터 시작됐다. 이한빛 PD 사망 이후 제작환경 개선을 약속했던 방송사가 3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같은 문제를 반복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분노는 이 사건을 빠르게 공론화시켰다. 더구나 <아스달 연대기>는 이그트족과 와한족으로 대변되는 소수자들을 향한 핍박을 비판하는 이야기였다. 이 같은 주제의식과 모순되는 제작의 현실은 드라마에 대한 몰입을 떨어뜨렸다. 방송가에 <아스달 연대기>가 남긴 유일하게 유의미한 교훈은 바로 그것이다.

<닥터 탐정>의 15회 에필로그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고 이한빛 PD) 그가 남긴 뜻은 빛이 되어 드라마 노동 현장을 조금씩 조금씩 밝혀나가고 있습니다.” 이 메시지대로 올해는 그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한 해였다. 드라마계에서 방송제작환경 문제는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이슈로 자리 잡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동백꽃 필 무렵>이다. 드라마가 큰 사랑을 받으며 막바지를 향해가던 무렵, 촬영 현장에서의 장시간 노동과 미계약 근로 문제가 불거졌다. 많은 소시민에게 희망을 주던 휴머니즘 드라마가 누군가의 과잉노동 위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은 배신감을 안겼지만, 제작사와 방송사가 사과와 함께 노사협약서를 체결하는 등 책임감 있는 대처를 보인 점은 좋은 선례로 남았다.

요컨대 2020년은 드라마계에 제일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을 완화하려는 정부의 움직임과 표준근로계약서 이행 과정에서의 진통과 같은 불안 요소도 있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드라마를 픽션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 시청자들은 앞으로 아동청소년 출연자 인권 보호, 성폭력 방지 대책 등 더 많은 제작환경 이슈에 주목할 것이다. <닥터 탐정> 에필로그 속, 이한빛 PD의 생전 인터뷰에는 그가 드라마 연출을 하게 된 이유가 나온다. “스토리가 있고 사람들에게 감정을 전달하잖아요. 내가 느낀 감동을 영상으로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의 말은 많은 이들이 드라마를 사랑하고 거기에서 위로를 받는 이유를 알려준다. 이제는 보는 이들만이 아닌, 만드는 이들에게도 위안이 되는 드라마의 시대가 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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