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보통 계획이 다 있다. 열세 살 무렵 <도전! 골든벨>을 시청하다 골든벨을 울린 언니가 5개 국어로 유창하게 인사하는 것을 본 뒤 무조건 5개 국어를 배우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 결심은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내 인생의 장기계획 중 하나로 남아있다. 앞으로 4개국의 언어를 더 배우기만 하면 된다. 또 20대 중반부터 급격하게 불어나는 체중의 관리를 위해 “매일 10㎞씩 걸어 건강을 회복하겠다!”는 한번도 실행한 적 없는 중장기적 계획이 있고, 부디 이 칼럼이 명문이 되어 널리 읽혔으면 하는 망상형 계획, 가깝지 않았던 학교 동기의 결혼식에 불참하기 위해 알리바이를 만드는 부도덕한 계획, 별다른 계획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살아지는 부를 갖고 싶다는 ‘무계획이 상팔자’형 계획도 있다.
계획의 크기와 종류는 이렇게나 다양하지만 무슨 계획이든 무산되는 순간에 느끼는 절망은 대개 비슷할 것이다. 나는 주로 내 부족한 의지로 인해 좌절되는 계획이 많은데 이건 몇 마디 자책으로 쉽게 풀리기도 하고 이후의 대책을 마련하는 게 가능해서 계획을 변경해 나가는 과정이라며 위안을 삼을 수도 있다. 외부 요인에 의해 별안간 좌절되는 계획만큼의 타격은 없다는 이야기다. 더구나 그 계획을 성실하고 훌륭히 잘 지켜왔다면? 그리고 계획 이상의 실적과 성취를 이뤘다면? 그때의 상실감은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나서 분노할 만큼 큰 것이다. 완성 직전의 도미노가 힘없이 무너지면 도미노 근처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탄식하는 것처럼 말이다.
박미선, 양희은, 이지혜가 진행했던 시사예능 <거리의 만찬>은 주제와 관련한 당사자에게 마이크를 주는 방송이었다. ‘시사예능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문이 나올 만큼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설정처럼 보이지만, 정치적 관점이 분명하며 언변이 좋은 진행자를 앞세우는 기성 시사예능 형태를 생각해보면 그런 상식과 보편성을 지키는 유일한 방송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사자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명쾌한 주장과 단단한 근거의 말들은 힘이 있었고, 외면받던 목소리를 과감하게 드러내는 방송이니만큼 그 말을 담아내는 세 명의 여성 진행자는 그 자체로 프로그램의 취지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존재였다. 그렇게 <거리의 만찬>은 첫 방송 때부터 시청자들에게 내비친 계획을 여러모로 훌륭하게 잘 지켜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여성 미디어 제작단체 ‘소그노’가 만든 웹 예능 <뉴토피아>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봤다. 출연자와 제작자는 모두 여성으로, 예고편만 봐도 ‘기성 예능의 구태한 관습을 재능 있는 여성들이 직접 바꾸겠다!’ 하는 기획의도가 대차게 드러나 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방송에 기대를 갖게 된 데에는 그들이 앞세운 포부와 계획이 적어도 타의에 의해서 무산될 리는 없을 거란 확신이 크게 작용했다. 애청자를 설득하기엔 타당성이 부족했던 <거리의 만찬> 진행자 교체 사태로 나는 방송을 선택하는 것에 대한 기준 하나를 더 얻은 셈이다.
나는 그러한 각성과 동시에 타의에 의해 좌절된 계획이 다시 회복될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담론의 균형을 기계적으로 맞추지 않고 늘 한쪽의 저울에 미리 추를 올려주었던 <거리의 만찬>이 본인들이 겪은 진통마저 직접 다루는 것을 상상하며 재개되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다. 이 훌륭한 도미노를 재건할 수 있다면 누군가를 원망할 여력도 그들을 지지하는 에너지에 보태고 싶을 만큼 말이다. 대개 이럴 때 만화에서는 “이것마저 나의 계획의 일부였다…” 읊조리고는 그 좌절을 다시 추진력으로 바꾼다. 전혀 계획에 없었으면서 다 계획의 일부였다고 말하는 만화의 주인공처럼, 좀 멋쩍더라도 다시 시작하면 좋겠다. 어차피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계획은 별로 없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