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새벽 4시 영하 15도의 골목길을 기억한다. 싼 맛에 구입한 새벽 비행기를 타러 공항 가던 길, 폐지 줍는 할머니를 보았다. 그는 75도쯤 굽은 등으로 쓰레기를 매만져 자기 몸체만 한 폐지를 구원해냈다. 누가 감히 게을러서 가난하다고 하는가. 고 노회찬 의원은 새벽 4시 구로에서 강남 가는 6411번 버스를 타는 청소 노동자에 대해 말했었다. 한겨울 새벽길에는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 이 세계의 평온을 몸으로 떠받치는 사람들.
2018년의 ‘쓰레기 대란’이 폐지로 돌아왔다. 똑같은 전개다. 전 세계 50%의 폐기물을 수입하던 중국이 이를 금지했다. 폐기물을 떠넘길 곳이 없어지자 폐기물 가격이 폭락한다. 그 결과 재활용의 춘추전국시대 혹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인 약육강식시대가 도래한다. 오로지 돈 되는 재활용품만 살아남는다. 돈 안되는 재활용품을 처리해봤자 운반비도 안 나온다. 그런데 아파트에서는 재활용품을 수거하려면 돈을 내라고 한다. 결국 수거업체들이 “안 가져갈 테니 알아서들 하세요”라고 답한다. 수거가 중단되고 우리 동네에 ‘쓰레기 산’이 쌓일 찰나, 우유팩에는 닭 뼈와 휴지가 꾸역꾸역 담겨 있고 박스에는 택배 송장과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재활용 업체는 이 ‘쓰레기’들을 외면하고 질 좋고 저렴한 외국산 폐지를 사서 쓴다.
중국이 폐기물 수입 금지를 더 강력히 시행하면 폐기물 가격은 더 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폐지를 줍던 사람들은 어찌 될까. 소설가 백영옥은 젠트리피케이션에 밀린 예술가를 “사람들이 기피하는 불편하고 후진 지역에 들어가 더러운 거 다 먹어 치우고 깨끗하게 해놓으면 땅값이 올라 자신들은 떠나야 하는 미생물 같은 존재”라 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쓰레기를 구원하는 사람이야말로 도시 삶을 떠받치는 필수 유익균 같은 존재가 아닐까. ‘충북인’에 따르면 청주에서 이들이 사라지면 소각·매립에 100억원 이상이 든다. 폐지 줍는 사람들은 100억원 이상의 세금을 아낀 대신 시간당 750~1000원을 벌었다. 2020년 최저시급은 8590원이다. 환경운동가 짐 퍼킷의 말처럼 “쓰레기는 늘 가장 저항이 적은 경제적 경로를 따라 흘러내린다.”
최근 미국과 일본에서는 질 낮은 혼합 폐지에 처리비를 지급하기 시작했다. 1년 전 인도에서 만난 쓰레기 줍는 ‘웨이스트 피커’는 주정부로터 발급받은 ‘직업 카드’와 복지 혜택을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그때 우리말에는 웨이스트 피커를 번역할 적당한 단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폐지만 줍거나 노년층만 하는 일도 아니건만 ‘폐지 줍는 할머니’ 외에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존재는 투명하게 지워진다.
삶이 쓰레기가 되는 순간은 일의 가치를 인정받지도, 보상을 받지도 못할 때다. 지금이라도 공공자금을 쏟아 멸종위기에 처한 폐지 줍는 사람들과 지구를 살려야 한다. 우리 스스로는 분리배출을 제대로 해서 타인의 노동과 지구를 갉아먹지 말고, 기업은 재활용이 쉽도록 물건을 만들어 해당 물건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다 귀찮고 싫다면 집 앞에 쓰레기 산을 껴안고 살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