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릿속 이태원은 총 네 구역이다. 핼러윈이면 마비되는 해밀턴호텔 뒤 레스토랑 밀집 지역이 1구역, 전국 골목상권의 이름을 ‘~리단길’로 만들어버린 경리단 오르막길이 2구역, 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생활권이 같은 후암동 해방촌 일대가 3구역, 이태원 소방서 뒤, 이슬람 사원 일대의 ‘우사단길’이 4구역이다. 네 곳 모두 이태원이라는 하나의 공간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태원로를 기준으로 나뉘는 1구역과 4구역은 모두가 쉽게 체감할 만큼 보여지는 풍경과 그 속에 있는 이야기가 다르다고 느낀다.
10대 때 처음 서울에 왔고 나는 몇 년간 홍대에서만 놀았다. 그때 홍대란 장소는 내가 젊다면 뭘 해도 다 용서받을 수 있는 곳 같았다. 옷을 내 멋대로 입어도 개성으로 이해받는 곳이었고, 놀이터에서 고성방가를 해도 버스킹이 되고, 길에 누운 취객도 예술가처럼 보였으며 그라피티로 가득 찬 벽 앞의 쓰레기들마저 훌륭한 작품 같았다. 어릴 적부터 글과 말로만 접한 ‘홍대’라는 이미지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홍대에서 이상한 옷을 입은 채 고성방가를 하고, 길바닥에서 술주정을 하며 살았다. 그라피티로 가득 찬 벽 앞의 쓰레기는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도 모른 채….
20대 중반이 되자 홍대에 미안해진 나는 새 삶을 시작하듯 무대를 이태원으로 옮겼다. 그때 함께였던 마산 출신의 친구는 “이제야 서울말을 자연스럽게 쓰게 됐는데, 굳이 한국어가 필요 없는 동네에서 놀게 되다니…”라며 미지의 이태원을 잔뜩 경계했다. 나는 “우린 젊다. 어딜 가든 환영받을 것이다!”라는 말로 친구들을 설득해 홍대에서 출발하는 택시를 탔다. 그러나 각오와 달리 경로상 자연스럽게 4구역인 이태원 소방서 앞에 내린 우리는, 그 즉시 이태원의 험난함을 겪게 되었다. 일단 그곳에 있는 거의 모든 클럽과 술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어떤 곳은 입구부터 자격이 필요했고, 어떤 곳은 들어가는 시늉만 해도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식당과 식료품 가게들은 생전 처음 보는 음식들을 팔았고, 사람들은 왠지 저마다 소속과 무리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언덕과 계단은 왜 그렇게 많은지 길을 헤매는 동안 숨이 차서 별말도 나누지 못했다. 관광객이 된 것 같은 소외감을 느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배척을 당하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룰로 통제되는 공간에 왔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꼈던 것 같다. 홍대에서 내가 만들어낸 정체 모를 가짜 해방감과는 완전히 다른 감정이었다. 나의 정체성은 이곳에서 어떤 존재로 규정될지 궁금했고, 내가 부정적으로 느끼면서도 강하게 속해 있던 ‘서울에 정착한 지방 출신 여성’이라는 특질 역시 희석되는 것 같았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혼란한 감정과 함께 그곳에 대한 애착이 생겼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와 UV의 노래 ‘이태원 프리덤’의 배경이 되는 이태원 1구역은 다른 번화가들과 비슷하면서도 ‘다양성’이라는 이태원만의 모호한 특질을 교집합으로 갖고 있어 많은 매체에서 매력적인 공간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내가 품고 있는 모호하고 의심스러운 이태원의 모습은 작년 12월 개봉한 강유가람 감독의 영화 <이태원>에 있었다. 영화는 기지촌 여성들의 생애와 일상을 통해 내가 몰랐던 이태원이 갖고 있는 긴 이야기를 들추면서, 번화가로 공간의 기능이 바뀌며 발생하는 변화를 보여주고, 그곳에 정착한 이들이 만들어낸 삶과 문화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집 앞을 잠깐 나갈 때에도 마스크를 착용하는 갑갑한 요즘은 영화 속 주인공 중 한 명인 70대 여성 나키의 “이태원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는 말이 자꾸만 생각난다. 때때로 공간은 얼마나 많은 것을 포용하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에겐 호흡할 수 있는 산소가 된다. 내 정체성의 무게를 끝없이 의심하게 만들어 다른 사람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곳. 내가 생각하는 이태원의 클래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