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대부분 ‘미친개’나 ‘싸이코’로 불리는 선생님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드라마와 영화에 나오는 악당교사의 별명도 대부분 똑같다. 나는 저 작명이 참으로 진부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다닌 중학교 학생주임의 별명이 저 두 단어를 합친 ‘개싸이코’였던 것을 떠올리며 클리셰가 아닌 현실반영의 차원에서 이해하기로 했다.
그 선생님은 정말 ‘개싸이코’라는 단어 외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중학교 졸업여행 때였다. 나와 함께 놀던 열 명 정도 되는 친구들은 점호 뒤 어수선한 시간을 틈타 유스호스텔 뒷마당 구석에 있던 작은 정자에 모였다. 무리 중 절반이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했기에 우리는 그 작별의 슬픔을 나눌 예정이었다. 물론 몰래 숨겨온 술을 한잔씩 마시겠다는 계획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손전등도 없이 안광만으로 우리를 찾아낸 ‘개싸이코’ 선생님의 조기 난입으로,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우리는 소주의 병뚜껑도 따보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엎드려뻗쳐’를 해야만 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만 놓고 보면 그냥 학생들의 일탈을 제어하는 선생님의 평범한 선도 같지만, 그의 광기는 우리들 중 특목고로 진학할 학생, 반장을 맡고 있는 학생, 성적이 좋은 학생을 차례로 열외시키면서부터 발휘되는 것이었다. “착한 애가 괜히 양아치들한테 휩쓸려서” “실업계 가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런 지능과 행실로 고등학교나 제대로 졸업하겠나” “먼저 인간이 돼라”…. 당구 큐대가 엉덩이 사이에 있는 꼬리뼈만을 노리고 타작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때 들었던 노골적인 차별과 흉악한 폭언만큼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가 떠난 뒤 두 편으로 쪼개진 우리는 제대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여행을 마쳐야만 했다.
나는 돌아오는 버스에서 생각했다. 왜 선생님을 말리지 못했을까? 왜 대들지 않았을까? 그전까지 스스로 정의로운 인간이라 굳게 믿었던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 자신의 비겁함을 깨닫고 자책을 했다. 그날 밤에 겪은 일과 상처를 대충 덮어버린 우리들은 상한 관계를 회복하지 못했고 그대로 졸업식을 하고,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며 점점 멀어지다 영영 소식을 모르는 남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날의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번번이 ‘나는 정의로운 사람인가?’라는 의심을 하곤 한다. 이 모든 것이 그날 밤 규칙을 어겼기 때문에 받는 처벌이라면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는 생각과 함께.
지난달 29일 공개된 넷플릭스의 <인간수업>은 학교 안과 밖의 경계를 지워 청소년 성범죄에 연루된 10대들이 과연 어디에서 인간다움을 배우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극중 주인공이자 가해자인 인물에게 부여된 과도한 서사 때문에 메시지가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교육기관과 어른들에 의해 대학입시가 최상위 가치가 되어버린 10대들의 세계를 비추며 그 질서에서 낙오되거나 계급적으로 소외된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주고, 미성숙한 어른들 밑에서 자란 10대 청소년에게 정의란 어떻게 형성되며 그것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집요하게 묻고 답한다.
이제 막 중학교 시절의 상처를 극복하기로 결심한 나로서는 정의로움과 용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답을 하기 어렵다. 다만 지금의 청소년들은 일찍부터 그런 가치를 우선으로 삼아 혼란에 빠지지 않고 명확한 답을 구할 수 있는 환경에서 생활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정의가 제대로 구현되는 것을 보여주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재난으로 인한 장기 휴교가 끝나고 드디어 개학일이 결정됐다. 나는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통해 어른으로서의 첫 번째 역할을 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