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깡’을 들으면 멍해진다. 그 노래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퇴근길에 동네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사서 걷고 있는데 갑자기 특공대 복장을 한 사람이 나타나 한 손엔 조명, 한 손엔 폭죽을 든 채 화를 내며 꿀렁대는 것을 본다면? 그러다 랩을 하는데 그 가사가 “모두 인정해 내 몸의 가치/ 허나 자만하지 않지”라며 자만을 하고 “허세와는 거리가 멀어 귀찮아 죽겠네”라며 허세를 떠는 내용이라면? 개인이 자신을 연출하는 방식이 자신감 넘치고 요란스럽다고 해서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며 멋지다고 박수치는 것도 이상할 것이다. 이미 사색이 된 얼굴로 잘한다며 환호해봤자 그 모습은 도리어 그를 위협하는 행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니 ‘깡’을 들으면 그저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요? 여기서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진다는 것이 가능한가? 물론 자만이나 허세가 자기 확신의 결과물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하지만 늘 무언가를 말한 뒤에 그 말이 받을 공격과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 쓰는 요즘은 그런 가짜 자신감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2018년 호주의 코미디언 해나 개즈비가 발표한 넷플릭스 코미디쇼 <나의 이야기>는 공개와 동시에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쇼에서 해나 개즈비는 절반이 지난 시점 갑자기 “이제 코미디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더는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뚱뚱하고 못생긴 레즈비언’으로 자신을 비하하거나, 고통스러운 과거를 농담거리로 만들지 않겠다고. 그것이 코미디라면 코미디를 그만두겠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 또한 명확하게 밝힌다.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을 존중하고 덜 외롭게 하기 위해서”라고. 더 이상 코미디를 하지 않기로 결심하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코미디가 되어버린 <나의 이야기>는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그만큼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것은 코미디쇼가 아니라 미화된 테드(TED) 강연” “쇼가 아닌 대학교 강의” “지루한 독백”.
2020년 5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해나 개즈비의 새로운 코미디 <나의 더글러스>는 <나의 이야기>를 통해 받았던 공격에 대한 해나 개즈비의 훌륭하고 세심한 답변이 들어있다. 기존 코미디가 갖고 있던 자학적인 웃음을 거두고, 그것이 나를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고백한 뒤 이 시대의 코미디는 끝났다고 외친 위대한 여성 코미디언은 전보다는 가벼운 표정으로 나타나 “<나의 이야기>가 이렇게 흥행할 줄 알았더라면 3부작 정도로 나눠서 할 걸 그랬다”는 유머를 던지며 새로운 쇼를 시작한다. 그는 한 시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치밀하게 설계한 대본 안에 수백 개의 복선을 만들고 회수하며 관객들을 쥐고 흔든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나의 이야기>를 향한 비판을 반박한다. “이미 테드는 미화되어 있는데 왜 또 미화를 하는 거죠?” “내 쇼가 강연 같다고? 진짜 강연을 보여줄까! 이게 강연이야!” 불이 꺼지고 무대 위 스크린에 그림들이 등장한다. 진짜 강연처럼 명화 속 여성혐오들을 엄청난 펀치라인을 통해 깨부순다. (해나 개즈비는 미술사학 전공자다)
말을 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자꾸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언제까지 생각만 할 것인가. 사람은 백퍼센트의 확신을 갖고 말할 수는 없다. 일단 꼭 해야 할 말이 있다면 하자! 그리고 돌아오는 반응이든 공격이든 그것과 맞서보자. 그렇게 하다 보면 나의 이상적인 주장과 초라한 현실 사이의 간극도 줄어들지 않겠나. 내 생각이 틀렸다면 실컷 우기다가 부끄러워하자. 지금도 이 글이 ‘비의 깡을 옹호하는 것처럼 읽히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겨낸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서문에 있지 않다! 그렇게 보인다면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