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25일은 보아의 데뷔 20주년 기념일이었다. 우리만의 언어와 우리만의 표현들로 가득 찬 세상을 꿈꾸라고 했던 10대 소녀는 ‘아시아의 별’이라는 타이틀을 거쳐 지금은 독보적인 경력과 실력을 지닌 아티스트가 되어 2020년에 정확히 20주년을 맞이했다. 정말 근사하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2000년에 발매된 보아의 ‘ID; PEACE B’는 ‘우리는 당신들의 세대와 다르며, 갈 수 없는 세계는 없다’고 씩씩하게 말하는 밀레니얼들의 교가 같은 노래다. 나는 ‘추카추카추’라는 응원을 받으며 사이버 자아를 무럭무럭 키웠고, 그 결과 ‘복길’이라는 제2의 정체를 얻었으며, “그 속에는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친구가 있죠”라는 가사처럼 온라인에서 만난 많은 인연과 끝없이 교류 중이다.

본명보다 ‘복길’이라는 이름을 내밀어 활동하는 곳이 늘고, 닉네임을 사용하는 친구들과 심적으로 더 가까워졌다는 걸 처음 느꼈을 때는 왠지 겁이 나기도 했다. 아무리 애착을 가진다 한들, 법적으로 보증받지 못한 일회용 닉네임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해도 되는 걸까? 교류가 점점 깊어질수록 장난으로 지은 이름처럼 금방이라도 모든 관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는지 늘 불안한 마음이 들고는 했다.

그런데 요즘 외출이 제한되고 집에만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 그런 불안이 자연스레 해소된 것 같다. 나는 매일 피포와 럽끼에게 오늘의 웃긴 사진을 공유하고, 조이스에게 금방 먹은 음식을 찍어 보내고, 소유에게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며, 핑프와 기약 없을 여행을 계획한다. 얼굴을 마주 보아야 정이 더해지는 오프라인 친구들과의 만남을 수없이 미루며 서로 소원해지는 동안, 느슨한 연락을 취하고 있던 온라인 친구들과의 관계는 큰 변화 없이 상대적으로 평온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격리된 시대의 진정한 친구관계인 것일까.

당근마켓 프로필에 자기 사진과 본명을 걸고 있는 우리 엄마는 그런 관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가끔 온라인 친구들이 준 선물을 풀어보다 닉네임을 소리 내어 말하면, 엄마는 심각한 얼굴로 “뭐 하는 애들이냐” 하고 물어본다. 그럼 나는 “비록 이해 못할 가명들을 쓰고 있지만, 그냥 한없이 멀쩡하고 선량한 사람들이야” 하며 친구들의 누명을 대신 벗겨준다. 아마 그 친구들도 가끔 내 정체를 이런 식으로 해명해주겠지.

유재석의 ‘유산슬’, 김신영의 ‘다비이모’, 이효리의 ‘린다 G’까지. 한국 텔레비전에도 이제 ‘부캐(부캐릭터)’라는 페르소나 개념이 자리를 잡았다. 나는 엄마에게 ‘유산슬’과 ‘유재석’의 차이를 설명하며 부캐를 이해시킬 작정이었다. “엄마, 유산슬은 트로트를 부르는 유재석이야.” 엄마는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굴하지 않았다. “유재석이 국민MC잖아. 근데 막 반짝이 입고 트로트를 부르면 왠지 부끄럽잖아. 그래서 유산슬이라는 가짜 신분을 만들어서 <아침마당>에 나오고 그러는 거야. 그러니까 유재석에게 ‘유산슬’은 도전을 위해 만들어진 새로운 신분인 거지.” 조금 이해를 한 엄마는 신기하다며 웃다가 유산슬이 작년 ‘연예 대상’ 신인상을 받았다는 말에 다시 혼란에 빠졌다.

다중 정체성을 이용한 퍼포먼스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나를 나누는 것이 쉬운 세대에겐 그리 특별하지 않은 개념이지만, 나와 타인의 정체성에 대해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겐 머릿속의 작은 벽 하나를 허무는 경험이 되기도 한다. 내가 만든 ID 때문에 자아에 괴리가 생기지 않을까 불안했던 나 역시도, 요즘엔 모든 것이 결국 나 자신을 이루는 것이라는 생각에 굳이 경계를 의식하며 부자연스럽게 행동하지 않으려 다짐한다. 다들 ‘부캐’ 하나씩은 가진 세상이니까. 비록 내 몸은 집 안에 갇혀 있지만, 분열된 것처럼 느껴졌던 나의 자아를 통합하고 나니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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