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시인을 섭외하자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플라톤이 놀랄 일이다. 공화국이 다시 태어난 순간에 시를 읊다니. 그가 꿈꾸는 도시에서 시인은 추방되어야 마땅하다. 왜냐면 시인이란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면서도 진실을 전하는 척하면서, 실은 신화를 이야기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단지 흉내 내는 자들일 뿐인데, 도시의 젊은이들이 그에게 영향을 받아 부지불식간에 영혼에 피해를 입을 수 있다. 플라톤이 보기에 시인은 위험하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지난 20일 미국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에 등장한 젊은 시인은 미국 시민뿐만 아니라 세계의 관중을 사로잡았다. 계관시인 어맨다 고먼은 취임식 며칠 전에 벌어졌던 의회난입 폭동사태를 보면서 ‘우리가 오르는 언덕’이란 제목의 찬사를 시로 완성했다. 그는 ‘그저 존재하는 것들이 언제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라고 개탄했지만, 결국 ‘우리가 빛을 똑바로 볼 용기가 있고, 빛날 용기가 있는 한, 언제나 빛이 있으리라’고 노래했다. 위태로운 공화국을 목격했던 시인은 그래도 정의를 희망해야 한다고 위험한 주장을 펼쳤다.

시인이 진실을 드러낼 능력이 있는지, 또는 정의를 노래할 자격이 있는지는 잠시 접어 두자. 어차피 진실을 주장하는 자의 능력과 자격에 대한 논란은 저 플라톤 시대에도 지금도 정답이 없으니 말이다. 대신 한 젊은 시인의 낭송이 왜 이렇게 감동을 주는지 생각해 보자.

아마도 우리는 물러간 통치자의 변명은 물론, 새롭게 당선된 최고 정무관의 약속마저 믿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그럴지 모른다. 지식인이 열을 내며 주장하는 가설이라는 게 현실에서 유리된 것은 물론 대체로 서로 모순이라는 점을 알게 돼서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사실을 사실이라 말하기 면구스럽다는 듯 ‘팩트’라 부르며 침방울을 튀기는 언론인을 보기에 지쳤나 보다. 어느 때보다 사실과 진실을 주장하는 자들의 진심이 의심스러운 시대에 진정한 마음을 노래하는 시인의 낭송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가 보다.

진정한 말이 귀하다. 우리가 겪었던 과거의 조례, 예식, 기념식을 떠올려 보자. 어떤 발언이 기억에 남았는가. 그중 어떤 선생님의 훈시, 사장님의 펩톡, 어르신의 주례사, 정치인의 기념사를 다시 듣고 싶은가. 아무리 형식이 곧 예식이고 참석이 예식의 요점이라지만, 공허한 예식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덧없는 훈시, 축사, 기념사, 즉 기억에 남지 않은 말들이다. 정치 집회와 사회 모임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믿어 달라고 공약하고, 피해를 호소하고, 존엄을 주장하는 가운데, 진심이라고 강조하는 말은 많아도 정말 그럴 것만 같은 목소리는 귀하다.

진정성에 대해서라면 확실히 젊은이로부터 배울 게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주례사 없이도 잘만 결혼하고, 부장님의 훈시가 없어도 잘도 분발한다. 진심이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목소리의 크기나 발언의 길이가 내용의 설득력을 보장한다고 간주하지 않는다. 출신을 속이는 말이 아닌 드러내는 말을 하고, 개성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는 행동을 한다. 아무리 마음에 있어도 꺼내서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없으면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를 다시 배운들 늙은이가 젊어질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이 찬 정치인과 지식인은 진정한 말과 본원적 경험을 연습이라도 해보았으면 한다.

이 한 가지만이라도 어떻게 해보자. 제발 공허한 발언으로 허례허식에 기여하지 말자. 청중 앞에 선 발표자는 물론 그를 소개하는 자라도 한마디를 해도 진심으로 말해 보자. 아무래도 청중에게 진심을 말할 사정이 안 되면, 그렇게 말할 수 있고 몸짓할 수 있는 연사를 섭외하자. 예식이 기리는 삶을 경험했기에 자신의 삶을 곱씹으며 살았던 사람을 찾아보자. 이렇게 본원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일마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을 섭외하자. 없는 말을 만들어 억지로 가꾸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하게 노래하는 시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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