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역설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과정을 통해 얻은 결론이 우리의 직관과 상식에 어긋날 때, 이를 역설이라 한다. 결론은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논리적인 허점을 쉽게 찾을 수 없는 역설이 더 재미있다. 역설(逆說)의 영어 단어 paradox에서 para는 반대 혹은 비정상을 뜻하고 dox는 의견 혹은 생각이라는 뜻이다. 역(逆)은 para에, 설(說)은 dox에 일대일 대응한다. 흥미롭게도 para는 가깝다는 뜻도 있다. 역설은 참에 가까워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참은 아닌, 직관에 반하는 주장이다. 얼핏 봐서는 틀린 것을 찾기 어려운.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학생 때 들은 재미있는 역설이 떠오른다. 흰 돌, 검은 돌, 많은 바둑알이 마구 섞여 있는 통에서 내가 몇 개의 바둑알을 집어내도 이들 모두가 같은 색이라는 역설이다. 먼저, 바둑알 하나를 집어내보자. 당연히 색은 하나다. 검거나 희거나 둘 중 하나지, 한 바둑알이 다른 색을 가질 수는 없으니까. 다음에는, 통에서 n개의 바둑알을 마구잡이로 집어냈는데 모두 같은 색이라 가정하고, n+1개의 경우에는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자. 통에서 n+1개를 꺼내고는 그중 1개를 옆으로 살짝 치워놓으면, 가정에 따라 남은 n개는 같은 색이다. 다음에는 방금 꺼냈던 1개를 다시 무리에 집어넣고 다른 1개를 꺼내면, 이때 남은 n개도 가정에 의해 모두 같은 색이다. 즉 n+1개 바둑알에서 처음 꺼낸 1개 바둑알도 무리의 다른 바둑알과 같은 색이어야 한다. 따라서, 결국 n+1개 모두 같은 색일 수밖에 없다. n=1일 때 참이고, 일반적인 n일 때 참이라고 가정해서 n+1일 때도 참임을 보였으니, 모든 임의의 n에 대해 증명이 끝난 셈이다. 수학적 귀납법에 의한 증명이다. 내가 통에서 몇 개의 바둑알을 꺼내도, 모두 같은 색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위의 논리 전개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혹시 눈치채셨는지? ‘같은 색’과 ‘한 색’의 의미를 일부러 섞어 만든 눈속임 문제다. 바둑알이 두 개인 경우를 생각하면 위의 엉뚱한 증명이 독자를 어떻게 속였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우리에게 도달하는 별빛의 세기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우리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있는 별의 수는 구의 표면적처럼 거리의 제곱에 비례한다. 따라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모든 별빛의 세기를 별의 개수와 밝기를 곱해 구하면, 거리와 무관하게 일정한 값이 된다. 결국, 우주의 크기가 무한대라면 우리에게 도달하는 별빛 세기를 모두 더하면 그 총합은 무한대가 된다. 밤하늘은 빈틈없이 빛으로 가득해 대낮처럼 밝아야 한다. 그런데, 왜 밤은 캄캄할까? 바로, 올베르스(Olbers)의 역설이다. 물론 현대 물리학은 이 역설에 답할 수 있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고 빛의 속도가 유한해, 유한한 거리 안에 있는 별의 빛만 우리 눈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캄캄한 밤하늘을 보면서, 우주의 팽창과 광속의 유한함을 떠올릴 일이다.

“기존 이론에 따르면 이러이러한 결과가 논리적인 귀결인데, 이는 우리의 상식이나 실제 실험에 부합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존 이론에 우리가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는 인식으로 우리를 이끄는 과학 역설은 과학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 여전히 남아 있는 미해결 역설은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려준다. 블랙홀 형성과 정보 소멸의 역설, 죽었는지 살았는지 여전히 궁금한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도 아직 해결된 것 같지 않다. 역설을 해결하며 과학은 자연과 우주를 배우고, 미해결 역설로 과학은 겸허를 배운다. 온 길이 뿌듯해도 갈 길이 더 멀다.

그럴듯하다고 진실은 아니다. 백신을 맞지 않았는데 한 번도 병에 걸리지 않았으니, 백신이 무용하다는 주장도 그럴듯(似)하지만 진실이 아닌(非) 사이비(似而非) 역설이다. 다른 많은 이가 백신을 맞았기 때문에 내가 병에 걸리지 않았을 뿐이다. 올겨울 추운 날이 계속 이어진 적이 있다. 그렇다고 지구의 온난화가 거짓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럴듯한 것을 진실과 구분하려면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안간힘의 이름이 바로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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