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신파와 출생률의 상관성 가설

신형철 문학평론가

급기야 ‘K신파’라는 말까지 나오고 말았다. 한국영화가 ‘눈물을 짜내는 플롯·연출’에 의존한다는 힐난이 담겨 있는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소비자가 싫다는데도 생산이 멈추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지 않을까. 싫다는 사람이 시장에서 소수이기 때문이다. 신파는 한국의 대중서사 소비 집단을 다수파와 소수파로 구획하는 기준이 된 것 같다. 신파로 분류되는 것들 중에서 특히 소수파의 거부감이 심한 소재는 ‘부모의 희생’으로 보인다. <7번방의 선물> <국제시장> <신과함께-죄와 벌> <부산행> 등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들의 본의 아닌 공통점이 그것이다. 여기서 여러 질문이 발생한다. 첫째, 한국영화에서 부모들은 왜 희생되는가. 둘째, 왜 다수의 관객들은 그것을 기꺼이 용납하는가. 셋째, 소수의 반대자들은 누구인가.

신형철 문학평론가

신형철 문학평론가

한국영화에서 부모가 자주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실제로도 그래 왔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에서 앞 세대는 가난하다. 이 경우 부모는 생물학적 본능에 따라 제 먹이를 아껴 자식에게 줄 것이고 덕분에 후속 세대는 상대적 풍요를 누린다. 구조적으로 부모 세대의 희생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가부장제적 성역할 분리가 관철되면, 여성은 집 안에 유폐되어 세계와 소통하지 못하고 남성은 집 밖을 부유하느라 가족과 소통하지 못하면서, 둘 다 2세를 위한 자멸적인 헌신을 통해서만 삶의 의미를 찾게 된다. 이 희생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로 말이다. 희생한 부모들이 있고 그들로 인해 내가 있다는 것, 이는 수십년을 개발도상국으로 살아온 한국사회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미 발생한 희생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관건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누구도 다른 누구를 위해 희생할 의무는 없으며 부모의 희생이라는 비극은 시스템의 실패를 방증하는 사태라고. 다른 이는 말한다. 그것은 시스템을 보완하는 위대한 헌신이며 인간의 얼굴을 한 신의 개입이라고. 독립적인 자아의 창조와 완성을 높이 평가하는 성숙한 개인주의 사회에서라면 부모의 희생은 찬미되기보다 자식의 희생 못지않게 부당한 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전체 속에서 개인이 맡는 관계적 역할을 강조하는 사회는 부모의 희생이 불가피하며 아름다운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불행한 희생은 막아야 할 것이 되지만 아름다운 희생은 감동해야 할 것이 된다. 후자를 ‘희생의 심미화(審美化)’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부모 희생을 강조하는 K신파
이를 본 청년들은 부담감 느껴
자식과 ‘함께’ 사는 서사 늘어야
부모 되려는 이들도 늘어날 것

신파 서사의 연이은 성공은 우리 사회가 희생을 심미화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희생의 수혜자에게서 죄의식을 끌어내고 그 고통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서사라면 윤리적이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우리는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오열하면서도 영화관 좌석을 지키는 것은 약간의 죄의식과 더불어 곧 주어지는 선물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부모는 원래 그럴 수 있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집단적 합의의 안도감 말이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속으로 감사인사를 올리고 고향의 아버지에게 전화 한 통 하자는 생각 정도나 하면서 우리는 자신을 또 한 번 용서한다. 게다가 자식이 있는 경우라면 내가 하고 있고 또 하게 될 부모로서의 희생을 생각하며 자기연민에도 조금 젖을 수 있다. 이렇게 죄의식은 자극되는 동시에 해소된다.

이 기이한 카타르시스의 제의를 최대치로 즐길 수 있는 것은 위(부모)와 아래(자식)를 다 가진 중년 세대다. 반면 미혼의 젊은 세대는 상대적으로 거부감을 더 느낄지 모른다. 조부모 세대의 희생으로 더 잘 살게 된 부모 세대와는 달리 오늘의 청년들은 제 부모보다 더 가난해졌다. 물론 이들의 부모도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있을 것이고 이들도 부모 고마운 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의 희생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재확인하는 일은 그들에게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채무자로서의 압박감을 선사할 것이다. 부모의 노후를 책임질 수 없다면 그들의 희생 역시 부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게다가 장차 제 자식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각오를 담보로 잡아 죄의식을 변제할 형편도 못 된다. 그들은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대중 서사는 대중의 경험을 귀납적으로 재현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로부터 대중적 경험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숱한 사랑의 서사는 실제 사랑들을 모델로 삼은 것이지만, 그 서사를 모방하며 사랑을 시작할 이들에게는 서사 자체가 모델이다. 부모 자식 관계를 재현하는 서사도 마찬가지다. 자식을 위한 희생이 부모의 운명임을 강조하는 K신파를 모델로 강요받는 일이 반복되면 청년 세대는 자신이 그런 부모가 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하는 쪽으로 더 나아가게 될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식과 ‘함께’ 사는 존재라는 점을 정당하게 강조하는 이야기가 많아져야 감히 부모가 되기로 마음먹는 이들도 늘어나리라. 그래서 오늘의 가설적 결론은 이것이다. ‘K신파는 출생률을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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