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동대문운동장이 남긴 교훈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정윤수의 오프사이드]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이 남긴 교훈

무려 다섯 개의 전철 노선이 감싸안으며 가로지른다. 상인 포함 약 15만명이 상주하고 하루 유동 인구가 100만명을 넘는 곳, 2호선에서 내리면 10m 거리, 조금 멀다 싶어도 6호선 신당역에서 5분이다. 수십대의 노선버스가 교차하고 택시들이 24시간 왕래하는 곳, 바로 여기에 운동장이 있었더라면, 그래서 프로야구가 열리고 K리그가 열려서 수많은 사람들이 스포츠의 작렬 순간을 만끽한 후, 동대문 일대에 실핏줄처럼 연결된 수많은 문화공간으로 흩어지는 풍경, 이런 상상을 그곳에 갈 때마다 한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동대문운동장 이야기다. 어느덧 15년 가까이 흘렀다. 2007년 12월13일 새벽,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 철거 공사에 돌입했다. 당시 오세훈 시장의 ‘디자인서울’ 정책에 따라 1925년 개장 이래 경성운동장, 서울운동장, 동대문운동장 등으로 개칭되면서 한반도의 근현대사 주인공이었고 목격자였고 증언자였던 운동장은 사라졌다. 물리적 공간이 사라지면 문화적 장소가 사라지고, 장소와 흔적이 사라지면 기억마저 흐려진다. 다만 몇 개의 유류품과 기록만 쓸쓸히 남을 뿐인데, 실제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가보면 한쪽에 약간의 기록물과 조명탑만이 한때 이곳이 100년 가까이 한반도 스포츠문화의 산실이었고 수많은 정치사회적 사건의 현장이었음을 외롭게 증언하고 있다.

지금 나는 사라져버린 운동장에 대하여 ‘역사, 장소, 기억’ 등 이른바 ‘인문학적 용어’로 감상적인 넋두리만 하려는 게 아니다. 더 획기적이고 더 미래적이며 더 창조적인 ‘융·복합의 문화산업’이 스포츠를 통하여, 다름 아닌 동대문운동장을 통하여 전개될 수 있었는데, 무위로 그친 것을 또한 애석하게 여기는 중이다.

그 자리에 DDP가 들어서서 지금껏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으나, 돌이켜보건대 DDP의 역할을 과연 동대문의 축구장과 야구장이 해내지 못했을까, 의아하다. 21세기 들어 이른바 ‘스포츠 선진국’들이 쇠퇴하는 도심지의 활력 넘치는 재생을 위하여 도심 내 대규모 운동장을 외곽으로 이전하거나 철거하는 대신 그 공간 자체를 리뉴얼하여 과감히 융·복합의 문화·교통·생활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 대세였다. ‘리뉴얼’의 뜻이 가리키듯이, 이렇게 도심 운동장의 고유 기능에 더하여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넓은 의미의 문화·관광·교류 산업이 대도시의 심장으로 다시금 쿵쾅거리게 하는 회복·재생·부활의 시도가 세계 곳곳에서 추진되었음에도, 우리는 그만 철거하고 말았다. 100년의 역사를 우리 스스로 지워버린 것이다.

오래된 과거 위에서 빛나는 미래를 구축해내는 것이 21세기 도시재생의 화두임에도 우리는 말갛게 장소를 지워버렸고, 그래서 그 위에서 다양한 가치와 산업이 창조적으로 접목되는 기회를 스스로 내팽개쳤다. 그 책임을 해체주의 건축가 자하 하디드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하디드를 포함한 해체주의 건축가들이 르 코르뷔지에 이후의 모더니즘 건축에 대해 대대적인 도전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드레스덴군사박물관이나 헤르조그 앤 드 뫼롱이 함부르크와 런던에서 성취한 작업들을 보면, 당시 서울시의 입장과 의지에 따라 지금과 같이 완전히 장소성을 ‘해체’하는 쪽으로 급발진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대규모 스포츠 공간이 단지 그 종목의 이해를 넘어서 도시의 재생과 활력에 상당한 기여를 한다는 것은 국내의 사례만으로 충분히 확인된다. 대구시 고성동의 시민운동장을 리모델링한 대구FC 전용경기장, 일명 ‘대팍’은 그야말로 쇠퇴한 도심의 ‘리뉴얼’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관람석 1만2000석 규모로 국내 축구전용경기장 중에서 가장 작은 곳이지만, 인근의 6만6000석 규모로 거대한 대구월드컵경기장이 할 수 없는 일을 ‘대팍’은 하고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 시민들의 삶 속에서 시민들의 생활 리듬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 차원에서 ‘스포츠도시’ 사업이 전개되는 중이고 선거 때마다 체육시설에 대한 공약도 자주 들린다. 그럴 때마다 동대문운동장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나는 수년 동안 스포츠가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스포츠공간 역시 마찬가지다. 시민들의 생활과 그 미묘한 일상 리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동대문운동장 철거는, 과거가 미래의 자산이며 스포츠공간이 시민 생활의 근거지이자 문화산업의 용광로가 된다는 것을 완전히 외면한, 역사의 반면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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