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 잡기

많은 ‘비메갈’들이 “ ‘메갈’은 대화가 안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사실이다. ‘메갈’들은 대화를 싫어한다. 마주 보고 앉아 상대에게 내 입장과 처지를 논리 정연하면서도 온화한 말투로 이해시키고, 학술적인 근거로 빈틈을 방어해야 하는 일방적인 행위를 ‘대화’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통제의 수단이지 투쟁의 수단은 아니기에 투사를 자처하는 ‘메갈’은 대화를 격렬히 거부한다. 그러니 ‘메갈’과 ‘비메갈’ 사이에는 대화가 불가능한 것이 맞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내가 텔레비전 예능 속 ‘이야기’ 콘텐츠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도 ‘메갈들’이 대화를 거부하게 된 원인과 비슷했다. 많은 사람들이 매력과 흥미를 느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늘 정해져 있었고 그건 여성 출연자의 몫이 아니었다. 살림, 화장팁을 전수하는 ‘리빙쇼’나 ‘뷰티쇼’가 아니라면 여성 출연자 대부분은 청자의 입장으로 남의 관점을 정리하는 보조 진행자의 역할, 잘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배우는 학습자의 역할에만 그치곤 했다. 이미 만들어진 문법 안에서 제한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이입을 하면,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아무리 감동적이고 재미있다 해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덜 흥미로워도, 덜 유익해도 좋으니 발화의 주체와 기본 언어를 전부 뜯어고친 새로운 형식을 갈망하게 될 뿐이었다.

그런 기대로 보자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는 전혀 새로운 프로그램은 아니다. ‘12·12사태’ ‘연쇄살인마 정남규’ ‘경제사범 조희팔’ 등 다양한 규모와 성질을 가진 역사·정치·사회 문제를 스토리텔링 기법을 표방하며 별다른 재연 없이 극적인 발화 구성을 통해 시청자의 몰입을 유도하는 이 쇼는, 오랜 탐사를 통해 이야기를 다루는 톤을 만들어 온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의 실험처럼 보였다. 처음엔 좀 어색하게 느껴졌다. 유튜브 개인방송이나 팟캐스트 등에서 인기를 끌어온 ‘썰’ 방송을 지상파에서 선보인 것이니, 시청자인 나를 배제하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대화하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가능성을 만든다. 지난 22일 <꼬꼬무>는 ‘101호 작전, 흰 장갑의 습격’이란 이름으로 부당한 인사에 항의하며 노조를 만들어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YH 무역 여성노동자 농성사건’을 다뤘다. 방송은 서사물의 공식대로 스릴, 서스펜스, 반전을 이용해 극적인 짜임새를 만들었고, 그렇기에 핵심 사건에서 벗어난 종반부에는 다소 허무한 여운을 남기며 잔잔히 사건을 정리하는 방향을 예상했다. 그러나 <꼬꼬무>는 시청자를 이야기의 더욱 깊은 곳으로 끌고 간다. 고 김경숙 열사의 개인사를 조명하면서 역사가 어떻게 여성 노동의 역사를 축소했는지 말하고, 그들이 당한 혐오폭력에 노동자와 여성이라는 이중 약자성이 존재했다는 것을 정확히 명시한다. 그리고 그들의 용기가 부마민주항쟁과 ‘10·26 사태’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것을 밝히며 이야기를 마친다.

가장 좋은 이야기는 상대방이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이 ‘대화’라 생각한다. 여전히 <꼬꼬무>의 어딘가 작위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은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YH사건을 다룬 에피소드의 완결성과 여성 노동사에 대한 적극적이고 성실한 해설은 예능에서 우리 세대의 여성들에게 다시 말을 찾아주며 대화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같은 죽음을 대하는 시선에도 계급적 격차가 있고, 언론이 그 무게를 달리 잴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요즘은, 그런 선택적인 관점과 강력한 스토리텔링을 주목이 필요한 곳에 할애하는 미디어를 지지하고 싶다. ‘이야기’의 힘을 통해 실재하는 미시사에 사회적 맥락을 불어넣고 싶다면, 여론에 책임을 전가하는 모호한 태도를 거두고 정확한 해석을 유도하는 책임을 보여야 한다. 대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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