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수를 생각한다읽음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나는 보수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수가 진보와 생산적으로 경쟁할 때 사회가 발전한다고 믿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에서 보수는 두 차례의 혁신을 모색했다. 첫 번째, 1970년대 후반 보수는 하이에크 등의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 신보수로 거듭났다. 미국 레이거노믹스와 영국 대처리즘은 대표 사례였다. 앤서니 기든스는 이 신보수를 ‘모순적 혼합물’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경제적으론 시장에서 개인의 경쟁력을 중시한 반면 정치적으론 가족 등 공동체의 보존을 중시한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모순적 성격에도 보수는 권력을 획득했고, 신보수주의 시대를 열었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두 번째, 2000년대 들어와 ‘제3의 길’에 맞서 보수는 울리히 벡이 말한 ‘우파적 제3의 길’을 추진했다. 제3의 길이란 영국 블레어 정부와 독일 슈뢰더 정부처럼 전통적 사회민주주의를 혁신한 기획이었다. 우파적 제3의 길이란 영국 캐머런 정부와 독일 메르켈 정부처럼 기성의 신자유주의를 혁신한 프로그램이었다. 캐머런 정부는 ‘따듯한 자본주의’를 앞세워, 메르켈 정부는 탈이념적 정치연합을 추구해 보수의 이념적 지평을 넓혔다.

최근 주목할 것은 보수적 포퓰리즘의 부상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포퓰리스트들은 계급·이념 균열에 ‘엘리트 대 국민’의 새로운 균열을 더했다. 미국의 트럼프 전 대통령 등 포퓰리스트들은 기성 정치인을 기득권자로 공격하고, 외국인 노동자를 적대시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러한 전략으로 포퓰리즘은 한때 권력을 장악했다. 2021년 현재 보수는 미국 공화당에서 독일 기민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보수는 서구와 다른 길을 걸었다. 광복 이후 보수의 동의어는 ‘박정희주의’였다. 박정희주의는 경제성장이란 목표를 위해 민주주의를 유보할 수 있다는 게 핵심을 이룬다. 결과를 위해 과정은 무시해도 좋다는 성장만능주의가 ‘시장 보수’로 거듭났다면, 국가를 위해 인권은 무시해도 좋다는 반공권위주의가 ‘안보 보수’로 나타났다. 시장 보수가 이명박 정부의 정체성이었다면, 안보 보수는 박근혜 정부의 정체성이었다.

시장 보수든, 안보 보수든 우리나라 보수는 2016년 촛불집회를 통해 정치·사회적으로 거부됐다. 지난 4년 동안 보수의 위기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에서 큰 힘의 하나가 ‘야당 복’이라는 말은 보수가 놓인 자리를 증거했다. 보수는 완전히 갈 길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철학의 빈곤에 있었다. 기질적 보수와 세력적 보수는 여전히 존재하는데, 박정희주의를 대체할 보수적 철학의 부재는 보수의 위기를 구조화시켰다.

보수가 새로운 동력을 얻은 것은 김종인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체제를 통해서였다. 김종인 위원장은 개혁적 중도보수를 보수의 새로운 길로 제시했다. 김종인 체제에 대해선 여러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지난 4월 재·보궐 선거에서 보수는 극적으로 소생했다. 선거 결과의 일등 공신은 ‘선택적 공정’으로 국민적 불신을 자초한 여당의 실책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오세훈 후보와 박형준 후보가 보여준 중도보수적 이미지와 성향 역시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제 보수 안에서 ‘이준석 돌풍’이 일어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세대교체에 대한 열망과 젠더 균열의 부상이 놓여 있다. 돌풍의 핵심은 국민의힘 대표 경선에 나선 이준석 후보에 대한 보수적 성향의 2030세대 남성 유권자로부터의 지지가 뜨겁고, 이 열기가 보수 유권자의 전 세대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대교체 열망을 이해할 수 있더라도 젠더 균열을 동원한 정치세력화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이 돌풍은 청년세대 안에서 젠더 갈등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반영한다.

내가 강조하려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 이준석 후보든,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든, 아니면 제3의 인물이든 보수를 대표하는 정치가라면, 박정희주의를 넘어선 보수의 철학과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시장·성장·통합·공동체와 같은 보수의 고전적 가치를 21세기 정보혁명 시대에 걸맞게 재구성해야 한다.

둘째, 이러한 보수의 변화는 자연스레 진보의 변화를 자극할 것이다. 진보 역시 국가·분배·개혁·개인과 같은 진보의 고전적 가치를 새롭게 혁신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렇게 보수와 진보가 생산적으로 경쟁하고 균형을 이룰 때, 다시 한번 말하면 우리 정치와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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