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은 남성도, 청년도 아니다읽음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발표자 중에 여성이 없어서요.” 토론회 발표 요청을 받으며 이런 말을 들었다. 썩 유쾌하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 여성이 필요하다는 거야? 의문의 1패다. 그러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나와 동료들도 토론회나 기자회견을 기획할 때 성비를 고려한다. 대표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살피며 조건을 바꿀 방법을 찾는 과정이다.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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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성비 불균형을 문제로 인식하게 된 것은 분명 진보의 증거다. 그러나 성비를 맞추는 것 자체가 진보는 아니다. 적임자를 평가하는 기준이 성별일 수는 없으며 사회에 성차별만 있지도 않다. 할당제에 늘 불공정 시비가 따라다니는 이유다. 대상 집단도 할당제가 달갑지만은 않다. 할당제의 구도에서는 차별의 피해집단으로 배려 대상이 되어버리거나 실력도 부족한데 기회를 꿰찬 수혜자로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할당제는 차별을 해소하고 평등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잠정적 조치다. 제도 자체가 아니라 제도가 놓인 맥락을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평등의 이념을 세우는 데 줄곧 실패해왔다.

1987년 민주화는 독재 정권에서 억압된 평등의 요구가 분출하는 계기가 됐다. 남성 합격자 수를 90% 정도로 유지하던 공무원 성별 분리 모집 기준이 20년 만에 폐지되었다. 평등의 힘은 내쳐 달아 최초의 할당제인 여성공무원 채용목표제를 등장시켰다. 군가산점 문제도 떠올랐다. 이전부터 있었지만 성별을 분리하여 모집할 때는 보이지 않던 제도였다. 차별을 인지하는 사회적 감각이 높아지면서 1999년 군가산점도 폐지됐다. 그런데 여성우대조치도 아니었던 군가산점 폐지가 엉뚱하게 역차별 논란에 휩싸였다.

배경은 두 가지다. 1997년 유력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의 두 아들 병역비리가 정치판을 흔들었다. ‘군대 다녀온 우리만 억울’하다는 정서가 팽배해졌다. 그해 겨울 외환위기가 닥쳤다. 실업은 급증했고 취업은 어려워졌으며 불안정노동이 확산되었다. 불만이 군가산점 폐지를 계기로 쏟아져나왔다. 언론은 성별 대립 구도를 부각했고 정치는 편승했다. 징병제도나 고용정책은 손대지 않고 ‘여성우대’가 문제라는 주장을 키웠다. 최초의 할당제는 남성과 여성의 비율을 조정하는 ‘양성평등 채용목표제’로 수정되었고 지금 남성이 더 수혜를 입는 제도가 되어있다.

평등이 비율을 맞추는 것으로 전락한 자리에서 역차별의 신화가 피어났다. 경제가 불안정할수록 역차별의 감각은 불붙기 쉽다. ‘빽 없는 사람만 손해 본다, 나도 힘든데 왜 저들을 배려해야 하나.’ 이제 위 상황에 ‘조국 사태’와 코로나19 경제위기를 대입해보라. 이준석이 여기에 올라타 ‘역차별의 정치’를 시작했다. 할당제는 불쏘시개가 됐다. 위험하다. 함께 누려야 할 권리 대신 남이 가져간 가상의 파이가 공론장을 장악한다.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는 동료시민을 향한다. “너 때문에 내가 힘들어!”

이준석은 남성도, 청년도 아니다. 역차별의 감각을 ‘보편적으로’ 조직하는 정치인이다. 역차별의 정치가 우려된다면 이준석이 아니라 그가 선 자리를 봐야 한다. 지금의 현상은 1987년 체제의 민주주의가 실패한 지점에서 기원한다. 페미니즘 앞에서 멈추고 노동을 지운 한계의 결과다. 촛불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 연이은 성폭력 사건에서도 드러나듯 성차별 구조는 여전하고, 노동자의 권리는 관심 없이 일자리 숫자를 치적으로 내세우는 현실도 그대로다. 여성 노동이 더 위태롭지만 ‘이대남’만 쳐다보는 모습도 한결같다. 더 늦기 전에 평등의 정치가 시작되어야 한다.

평등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거나 우대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약자가 되는 구조를 바꾸자는 이념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이 그 시작임을 재차 강조한다. 그러나 시작일 뿐임을, 페미니즘과 노동과 생태의 지평에서 새로운 민주주의를 여는 일이 긴급한 과제가 되었음을 더욱 강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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