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이 당연한 세상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지난달 한 대학의 인권센터로부터 강연 요청을 받았다. 학내 성소수자 인권 증진을 위해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를 주제로 한 강연이었다. 그런데 한창 강의 준비를 하던 중 연락을 받았다. 강의 홍보가 나간 후에 교내외에서 반발이 있었고, 이에 인권센터장으로부터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아달라는 의견을 전달받은 것이다.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박한희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

대학과 같이 다양한 청중이 있는 자리에서 강연을 하다보면 여러 일을 겪게 마련이다. 몇 년 전에는 한 기독교 계열 학교에서 성소수자 차별을 주제로 강연을 한 뒤 보수 개신교 단체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내 사진이 게시되고 학교 측에 항의가 쏟아진 일도 있었고, 다른 학교에서는 차별금지법에 대한 강의에서 역차별을 이야기하는 교수와 설전을 벌인 적도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강연 전에 차별금지법 자체를 언급하지 말라는 연락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학내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 증진, 성소수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전달, 다만 갈등의 여지가 크므로 차별금지법에 대한 일체 언급 자제 부탁’. 이렇게 적힌 메일을 보며 정말 여러 생각이 들었다. 차별금지법 없이 성소수자가 겪는 어려움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혐오의 문제가 학교 측의 제도적 대응으로 해결할 것이 아닌, 서로가 이해하고 예의를 지키면 될 문제라고 생각하는 걸까? 도무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요청이었다.

당연하지만 이런 요청을 받고 강연을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결국 강연을 취소하기로 했다. 하지만 취소 메일을 보내고 나서도 계속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해당 학교 내에도 당연히 존재하고 있을 성소수자 학생들을 생각하니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학내 성소수자가 겪는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도 차별금지법에 대해서는 민감한 이슈라며 언급을 꺼리려 하는 인권센터장이 있는 학교라면, 성소수자 학생들이 제대로 보호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은 능히 짐작된다.

이러한 일들은 해당 학교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막상 차별금지법 제정에는 침묵하는 여러 정치인의 태도와 이러한 가운데 성소수자가 마주하는 차별의 현실 역시 이와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이 답답하게 다가오지만 그렇다고 멈춰서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차별금지법을 언급하는 것조차 꺼리는 이들이 있다면, 그에 맞서는 길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수많은 시민이 있음을,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수많은 동료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오는 23일까지 차별금지법 국민동의청원이 진행 중이다. 10만명이 찬성하면 국회에 관련 논의를 부칠 수 있는 이 청원에 이미 9만명에 가까운 이들이 동의를 보냈다. 남은 1만명의 자리를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채워주기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강연을 취소하며 조금이나마 인권센터가 스스로 돌아보기를 바라는 마음에 적은 메일 내용을 붙여본다. 부디 이제는 더 이상 이러한 이야기를 할 필요 없이, 차별금지법이 당연한 세상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차별금지법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전제라면 이번 강연 진행은 불가능합니다. 차별금지법이 단지 중요한 법이라서만이 아니라 이 법과 관련되어서 이야기하는 내용들이 모두 제도적 차원에서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에 대항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이는 학교 차원에서의 학칙이나 인권준칙을 통한 차별금지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어렵다는 것과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성소수자 혐오와 차별 대응’이라는 강연을 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차별금지법 국민동의청원 바로 가기(https://bit.ly/equality1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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