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닌데’ 아니라 ‘나부터’ 차별금지법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나도 67세는 처음이야.”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 배우의 말이다. ‘인생어록’이란 공감이 많다. 매일 집과 사무실을 오가는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라 생각하지만 풍경, 사람, 상황 모두 같은 적은 없다. 늘 ‘처음’을 살고 있다. 그런데 ‘처음’을 살고 있는 나는 ‘과거’의 나이다. 대체로 알 수 있는 상황, 세상과 만나지만 생각지 못했던 장면과 순간,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당황하고 혼란스럽고 분노하거나 좌절하기도 한다. 잘 대처하고 넘어가기도 하지만 실수하거나 실패하기도 한다. 인생은 언제나 현재 진행형이라는 깨달음과 실수해도 실패해도 괜찮다는 안도감을 얻는다. 동시에 언제나 ‘과거’의 나를 성찰하고 또 다른 ‘처음’을 잘 살아내야 한다는 무게감도 생긴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얼마 전 문장길 서울시의원이 속옷이 비치게 교복을 입은 여학생에게 벌점을 주는 학칙의 인권침해를 지적하며 전면 수정·폐기토록 하는 정책을 마련키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반가운 소식이면서 아직도 그런 학칙이 있다는 데 놀랐다.

학칙은 학교공동체가 함께 추구하는 지향이나 지키려는 가치를 담은 것이다. 어떤 가치에 합의하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어떤 노력을 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학칙이고, 그 과정을 밟는 것이 학칙 제정 또는 개정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원래 학칙은 그냥 있는 것이고 학생은 그저 따라야 할, 지켜야 하는 사람이다. 이번 학칙 개정 과정에서 인권침해라는 단선적 판단보다 ‘여학생의 속옷이 보여서 훼손되는 가치는 무엇이고 여학생의 속옷을 가려서 얻으려는 공동체 가치는 무엇인가’부터 질문했으면 한다. 왜 나, 선생님, 학부모는 여학생의 속옷이 보이는 것이 불편한지, 낯설고 당황스러운지 살펴보면 좋겠다. 여학생들이 조심해야 한다고, ‘정조’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좋겠다. 학칙이 학생, 교사, 학부모의 어떤 인식과 태도에 영향을 받았고, 누구의 행동 변화에 긍정적·부정적 영향을 미칠지 살펴보고 논의했으면 한다.

성폭력 피해자 유발론과 피해자 책임론,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단어로 들으면 ‘난 아닌데’ 싶지만 나의 일상 태도는 그 인식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 ‘과거’의 나의 관습과 통념,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 당연함 때문에 미처 깨닫지 못할 수 있다. 나의 익숙함이 다른 사람의 불편함과 고통 위에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감각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바라는 국민동의청원이 성사됐고 이상민 의원이 평등법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제 ‘과거’의 나를 성찰하고 또 다른 ‘처음’인 차별과 혐오 없는 세상으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 차별금지법은 포용적이며 공정한 사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올해 안에 꼭 입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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