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공화국이다

세종시청에서 뜻밖에 멋진 연극을 보았다. 2021년 대한민국연극제(안동·예천)에 오를 작품, ‘마음의 준비’다. 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다. 누군가 임종 직전, 의사가 가족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강수돌 전 고려대 교수·세종환경연합 난개발방지특위 위원장

강수돌 전 고려대 교수·세종환경연합 난개발방지특위 위원장

이 연극은 ‘평소에’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귀띔한다. 스토리는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투렛증후군 탓에 말을 더듬고 욕을 해대는 여고생 ‘하늘이’ 얘기다. 다른 하나는 ‘출생의 비밀’을 숨기려 돈과 명예에 매달리는 의사 ‘서 박사’ 얘기다. 하늘이는 부모의 무관심, 불화와 폭력으로 얼룩진 분위기 탓에 투렛증후군에 시달린다. 서 박사는 뒷돈을 받고 방송에서 특정 건강식품 과장광고를 한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는다. 나중엔 메디테이너 서 박사가 하늘이의 난치병을 치료하는 특별쇼까지 한다. 흥미롭게도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지속되는 가운데 서로 마음의 문이 열린다. 둘 다 자기 내면과 마주친다. 지금까지 속에 꼭꼭 감추었던 것들,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 드러나면 체면을 망치게 될 것들, 이런 것들까지 용기 있게 드러낸다. 치유·회복의 과정이다. 이 연극은 우리에게 묻는다. 속마음을 드러낼 ‘마음의 준비’가 됐냐고.

그러고 보니 대한민국은 ‘은폐’ 공화국이다. 하늘이가 우리다. 우린 어릴 적부터 상처를 받으며 자란다. 무엇보다 폭력적 관계, 사랑의 결핍이 핵심 뿌리다. 생활고와 애정 부재로 다투는 부모, 가정폭력, 공감·소통 부재, 입시 중압감, 막연한 불안, 이런 게 겹쳐 하늘이는 “태어난 것” 자체를 가장 후회한다. 이 정도면 삶의 의미도, 기쁨도 없다. 그 고통이 (수시로 욕을 하는) 투렛증후군으로 집약됐다.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 이 난치병은 원래 현실의 고통에 기인하지만 그걸 솔직히 드러내고 풀기보다 은폐·억압, 회피·묵인했기에 발병한다. 두려움 때문이다.

서 박사 또한 상처가 깊다. 왜냐하면 누나가 미혼모가 되면서 이를 감추고자 막냇동생으로 출생신고한 것! 이 아기가 커서 ‘군사부일체’란 폭력과 맹훈련으로 의사가 됐는데, 그게 서 박사다. 즉 외할머니를 엄마라 착각했고, 엄마를 누나라 부르면서 자란 것! 비밀은 언젠가 밝혀진다! 그러나 땅밑 진실이 드러나는 것 자체는 고통이다. 그래서 애써 숨기려 했다. 그런데 서 박사는 이미 상당한 돈과 지위를 가진 의사라, 하늘이만큼 무력하진 않다. 그러나 그 역시 자신의 치부를 감춘 채 ‘강자 동일시’ 심리 속에, 갈수록 돈과 명예에 중독된다. 하나 모든 중독은 마침내 심리적·사회적·물리적 죽음을 부른다. 서 박사 역시 돈이란 중독물에 걸려 감옥행 직전! 이 위기를 돌파하려고 쇼까지 벌인다. 하늘이의 난치병을 대화로 치유하는 쇼!

솔직히, 대한민국은 ‘중독’ 공화국이다. 재벌(기업가)은 물론 정치가, 행정가, 금융인, 판검사 등 파워 엘리트들이 돈과 권력에 중독됐다. 공권력이나 조폭이 그 뒤에 있다. 심지어 교육자, 언론인, 예술인, 종교인 등 사회가 타락할 때 진실을 말하고 빛을 밝혀야 할 존재들마저 ‘내부자들’로 변질됐다. 실상이 이러니, 그 어떤 보통사람이 돈과 권력을 둘러싼 경쟁을 피할 수 있는가? 큰손들이 먹고 튀면, 잔챙이들이 떡고물이라도 챙기려 든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일중독, 돈중독, 권력중독, 경제성장 중독에 빠져드는 배경이다.

이게 또 대한민국을 ‘투기’ 공화국으로 내몬다. 새마을운동 정신, ‘근면·자조·협동’은 그 자체로는 좋은 가치지만, 지난 60년간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보면, 모두 ‘배신’당했다. 보통사람들, 즉 민초들은 나라가 시키는 대로 했지만, 과로까지 하며 근면·성실할수록 나중엔 ‘바보’가 된다. 배운 자, 높은 자, 가진 자, 약삭빠른 자들이 ‘자기들끼리 다 해먹’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탕주의에 기대고, 주식, 부동산, 가상통화에 쏠린다. 이른바 ‘LH 사태’는 LH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라 전체가 문제다. 만일 마지막 희망도 없다면 자살도 감행한다. ‘자살’ 공화국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마치 하늘이와 서 박사가 비록 치유의 ‘쇼’를 벌였지만, 뜻밖에 자아와 접촉하는 바람에 마음의 문을 열었듯, 대한민국도 이제 과거에 숨겼던,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와 진실을 정면 응시하며 말문을 열어야 한다. ‘광복절’이 있지만 여전히 해방은 없고, ‘민주화’가 되었으나 여전히 민주주의는 부진하다. 이 연극은 현재가 혼미할 때, 그 ‘끝’을 보면 실마리가 보인다 한다. 어른이나 성공한 자들이 아이나 보통사람들을 훈육, 통제할 필요가 없다는 암시도 한다. 이제 당신도 ‘마음의 준비’가 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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