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이 ‘노회찬 정신’ 실종?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노회찬 의원의 3주기가 코앞이다. 그를 잃은 정의당은 ‘노회찬 정신’도 잃어버렸다는 비판까지 수시로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 ‘노회찬 정신’이 뭔가. 비판자들이 덧붙이는 말들을 보면 그 내용을 대강 파악할 수 있다. 정의당이 민생이나 노동 문제가 아니라 여성이나 성소수자, 장애인 인권 같은 다양성 의제에만 몰두한다는 얘기다. 노 의원은 그러지 않았다는 게 비판의 전제다.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강남규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위원

정의당은 정말로 민생과 노동에 무관심해진 걸까? 이를 확인할 여러 방법이 있지만, 간단하게 정의당 소속 국회의원 6인의 대표발의 법안을 살펴볼 수 있겠다. 이 목록이 곧 원내정당 정의당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목록일 테다. 7월11일까지 이들이 대표발의한 법안은 172건인데, 이 목록은 비판자들의 지적과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여성 문제와 관련한 법안은 총 8건에 불과하고, 그중 2건은 같은 내용을 다룬 여러 법안을 함께 개정하는 ‘패키지 법안’이다. 장애 문제를 다룬 법안은 장애 인권 활동가 출신인 장혜영 의원만 총 4건을 냈다. 여기에는 차별금지법안도 포함된다.

나머지 법안들은 주로 노동·소상공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예컨대 가장 많은 비난을 받는 류호정 의원은 대표발의 법안 22건 중 절반인 11건이 노동과 소상공인에 관한 것이다. 그 내용도 다양하다. 포괄임금 금지, 채용비리 처벌, 임금체불 처벌 및 구제, 초단시간 노동자 권리확대, 초과이익 공유제까지 다방면에 걸쳐 있다. 소상공인 손실보상법 소급적용을 촉구하며 64일간 국회 본관에서 농성도 했다. 장혜영 의원 역시 대표발의 법안 16건 중 7건이 노동과 소상공인에 관한 내용이다. 원내 활동이 정당의 전부가 아니라는 반론이나 이런 활동들을 충분히 알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 여성 이슈를 더 다뤄야 한다는 비판이면 몰라도, ‘정의당이 여성만 챙긴다’는 문제 제기는 실제와 다소 거리가 먼 셈이다.

‘정의당이 노회찬 정신을 잃어버렸다’는 문제 제기도 그렇다. 사실 노회찬 의원부터가 비판자들이 말하는 ‘노회찬 정신’과 거리가 멀었다. 그의 제1호 법안은 호주제 폐지 법안이었고, 차별금지법을 발의했으며, 트랜스젠더들의 권리를 위한 성별정정특별법을 발의한 바 있다. 성폭력 범죄 재판이 끝날 때까지 피해자에 대한 무고 혐의를 수사하지 않도록 하는 법안도 냈다. 이쯤 되면 그야말로 다양성의 화신 아닌가? 같은 정치를 해도 노회찬 의원은 ‘정신’이 되지만 다른 정의당 의원들은 비판만 받는 상황은 그 자체로 중요하게 분석될 만하다. 정책에는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고 논란이 될 만한 발언에만 관심을 두는 언론 탓일 수도 있고, 특히 장혜영·류호정 두 의원은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과소평가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노 의원의 시대에는 어떤 이념이 있었다. 그의 다종다양한 정책들은 ‘민주·평등·해방’이라는 이념(민주노동당)이나 ‘정의로운 복지국가’라는 이념(정의당)으로 포괄되어 재정렬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의당의 누구도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복잡해진 한국 사회의 다양한 요구들을 포괄하기엔 한계가 많은 언어임을 이해하기 때문일 테다. 또렷한 이념이 없으니 정책들은 정렬되지 않은 채 제각각 흩뿌려지고, 사람들은 정의당의 정체성을 자기 시야에 보이는 대로 해석한다.

노회찬 정신을 잃어버렸다는 비판은 일정 부분 오해 또는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단순히 무시하고 넘어갈 일은 아니다. 그 오해와 편견을 넘어서는 것은 온전히 정의당의 책임이고, 비판자들조차 설득해낼 때 반등이 시작될 수 있다. 진보정당 정의당은 2020년대에 어떤 언어로 그 폭넓은 정책들을 정렬할 것인가? 무엇으로 대중의 가슴을 뛰게 만들 것인가? 지금 정의당이 정말로 잃어버린 게 있다면 노회찬 정신이 아니라 바로 그 언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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