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7월은 치자꽃 향기 속에

이해인 수녀
ⓒ원유헌

ⓒ원유헌

7월은 나에게
치자꽃 향기를 들고 옵니다
하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고요히
노란빛으로 떨어지는 꽃은
지면서도 울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도 모르게
눈물 흘리는 것일 테지요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내가 모든 사람들을
꽃을 만나듯이 대할 수 있다면
그가 지닌 향기를
처음 발견한 날의 기쁨을 되새기며
설렐 수 있다면,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꽃밭이 될 테지요

7월의 편지 대신
하얀 치자꽃 한 송이 당신께 보내는 오늘
내 마음의 향기도 받으시고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어
향기로운 나날 이루십시오.

- 산문집 <기쁨이 열리는 창> 중에서

2004년에 출간된 <기쁨이 열리는 창> 글모음집에 소개된 이 시가 누가 시작한 건지 몰라도 해마다 7월이 되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너무도 많이 돌고 돌아 마침내는 저에게 도착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때론 힘들지만 옆의 사람들을 꽃을 대하듯이 대하도록 노력해 보겠다고, 지금 이 순간을 마지막 순간이라 여기는 간절함으로 사랑을 시작해 보겠다고 자신의 다짐과 결심을 적어 보내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은 이 시를 한여름의 러브레터로 띄우고 싶습니다.

이해인 수녀

이해인 수녀

우리 수녀원 정원에도 지금은 치자꽃이 많이 피었는데 그 향기가 진동을 해서 꽃을 만나기도 전에 아주 멀리서도 꽃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신 제 어머니가 하얀 치자꽃잎을 넣어 쓰신 편지를 지니고 있는데 꽃잎은 누렇게 빛이 바랬지만 그 향기는 아직도 남아 있어 그리움을 더해 줍니다. 우리가 지상에 살아있는 동안 ‘어쩌면 마지막으로 그 향기를 맡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오늘은 유독 이 구절에 눈길이 머뭅니다.

요즘 우리 수녀회 관구장, 총원장을 두 번이나 역임한 원로수녀님이 노환으로 입원 중이었는데 통증이 심해 호스피스병동으로 이동했다는 말을 들은 이 아침, 그분이 언제 어느 시간에 갑자기 임종할지도 모르는데 요즘 같은 시기엔 출입이 통제되어 있으니 평소 마음에 담아두었던 말로 작별인사를 할 수조차 없어 슬픔이 밀려옵니다. ‘먼저 좋은 데 가시거든 저 좋은 자리도 하나 꼭 부탁합니다’ ‘지금 와서 말이지만 옛날에 왜 그리도 저를 엄격하게 대하고 힘들게 하셨어요?’ ‘예비수녀 시절 병원 약제실에서 수녀님 지도하에 약병을 씻고 약봉지를 열심히 싼 덕분에 수도생활에 필요한 끈기를 배웠어요’ 하고 고백하고 싶었는데 그럴 기회가 올 것 같질 않습니다. 얼마 전 커다란 종이에 재밌는 그림들을 붙여서 응원의 편지를 보낸 일이 있는데 간병수녀에게 그걸 벽에 붙여두라고 했대서 그나마 위안을 받았습니다.

함께 살던 이들의 마지막 가는 길에 설령 인사할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그땐 이미 환자가 극심한 육체적 고통 속에 있기에 대책없이 바라보기만 할 뿐 더 이상 소통이 되지 않아 답답했던 적이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네’ ‘마지막 인사까지 미루지 말고 순간순간 사랑의 인사를 미리 해두어야 그나마 덜 후회하게 되는 거네’라고 힘없이 혼잣말을 해보곤 했습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힘겹게 임종을 준비하는 이들을 기억하며 하얀 치자꽃 향기에 눈물을 묻고 기도합니다. 떠나는 이에게도 보내는 이에게도 주님의 은총과 자비가 가득하기를! 이별의 슬픔 속에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깊은 사랑이 이심전심으로 피어나 영원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나직이 기도합니다.


Today`s HOT
러시아 미사일 공격에 연기 내뿜는 우크라 아파트 인도 44일 총선 시작 주유엔 대사와 회담하는 기시다 총리 뼈대만 남은 덴마크 옛 증권거래소
수상 생존 훈련하는 대만 공군 장병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불법 집회
폭우로 침수된 두바이 거리 인도네시아 루앙 화산 폭발
인도 라마 나바미 축제 한화 류현진 100승 도전 전통 의상 입은 야지디 소녀들 시드니 쇼핑몰에 붙어있는 검은 리본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