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논문

지금껏 적지 않은 수의 물리학 논문을 썼다. 그래도 여전히 무척 어렵다. 과학 논문을 펼치면 제목과 저자 목록 바로 아래에 ‘초록’이라고 불리는 논문 요약부분이 보인다. 다른 이의 논문을 살펴볼 때 나는 먼저 초록을 잠깐 읽는다. 초록이 재밌으면, 본문을 꼼꼼히 읽기 시작한다. 제목과 함께 논문 저자가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이 초록일 수밖에. 지금까지 본 가장 재밌는 초록 1등은 바로 ‘Abstract’ 아래에 적힌 딱 하나의 문장이었다. “Yes, but some parts are reasonably concrete.” “네, 추상적인 것 맞아요. 그런데 논문 일부분은 그래도 어느 정도 구체적이랍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는 초록을 읽고 웃음을 터뜨렸다. ‘논문 초록’이라는 뜻과 ‘추상적인’이라는 뜻을 모두 가지고 있는 영어 단어 ‘Abstract’를 가지고 한, 논문 저자들의 작은 농담이다. 과학자도 사람이다. 논문으로 가끔 장난도 친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우리’를 뜻하는 ‘We’와 특정인이 아닌 ‘누구나’를 뜻하는 ‘One’이 논문의 능동태 문장의 주어로 주로 등장한다. 저자들이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이러이러한 결과를 얻었다고 적을 때, 문장의 주어로 ‘We’를 쓴다. 이때 재밌는 문제가 생긴다. 만약 저자가 딱 한 명이라면 어떨까? 1인 저자의 논문 문장도 ‘We’로 적는 것이 물리학 논문의 표준이다. 혼자 쓴 논문의 문장을 ‘We’라는 복수형 주어로 시작하는 것이 나도 어색했던 기억이 있다. 오래전 내가 일했던 스웨덴 연구 그룹의 민하겐 교수도 그랬던 모양이다. 혼자 쓴 논문에 ‘We’를 주어로 적는 것이 너무 어색해 이분은 재밌는 다른 방법을 찾았다. 논문 저자에 가공의 인물을 한 명 더 적고 문장을 ‘We’로 시작하는 방식이다. 검색해보면 ‘P. Minnhagen’과 ‘G. G. Warren’, 이렇게 두 명의 저자가 함께 출판한 오래전 논문을 지금도 찾을 수 있다. 두 번째 저자 ‘G. G. Warren’이 바로 세상에 없는 가공의 인물이다. 가끔 사람들이 ‘G.’가 어떤 이름의 약자냐고 묻기도 했다는 재밌는 얘기도 들었다. 민하겐 교수와 나, 이렇게 둘이 서로 자기가 맞다 우기다가, 그러다 또 즐겁게 웃기도 하며, 매일 몇 시간을 토론하며 보낸 몇 년이 지금도 참 그립다. 잘 몰라도, 엉뚱한 생각이라도, 서로 마음을 열고 토론하는 것이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이분께 배웠다. 과학도 사람의 일이다.

종류와 성격에 상관없이, 완성되어 공개된 모든 지적·예술적 성취의 이해와 해석은 만든 이가 아닌 읽고 보는 이의 몫이다. 저자가 의도한 수수께끼가 있고, 이를 독자가 노력하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도 아니다. 저자도 모른다. 작품의 의미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저자는 어디에도 없으며, 작품의 통일성은 작가의 머릿속이 아닌 개별 독자의 머릿속에서나 각각 추구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얼마 전 철학 입문서에서 읽은,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의 맥락이다. 저자의 머릿속 어렴풋한 생각이 활자화되어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의미는 좀 달라도 과학 논문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물가에서 노는 아이는 후다닥 달려가 도울 수 있지만, 일단 세상에 나온 논문에 대해 저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해보니 되더라고요”가 논문 쓴 저자의 솔직한 심정이더라도, 출판된 과학 논문은 모두 다 하나같이, “한번 해보세요. 누가 해도 될 겁니다”로 읽힌다.

논문을 출판하면,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은 저자의 손을 떠나, 중원의 수많은 다른 무림 고수 과학자의 비판과 검증에 투명하게 노출된다. 무림과 달리 숨겨놓고 혼자서만 볼 수 있는 무공의 비급도 없다. 그런 것이 있어도 논문에 공개하는 것이 과학 무림계의 불문율이다. 예술 작품과 다른 것이 더 있다. 과학 논문의 독자는 구체적인 한 명 한 명의 개인이 아닌 불특정 과학자 ‘누구나(One)’다. 저자가 아닌 그 누구라도 논문에 소개된 연구의 방법과 과정을 따라하면 똑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저자가 확신할 때만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과학계의 관행이기 때문이다. 논문의 출판과 공개로, 저자는 연구 수행의 유일한 주체라는 기존의 지위를 모든 ‘누구나(One)’에게 양도한다. ‘저자’는 죽고 과학은 꽃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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