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디트의 불편한 주인의식읽음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 크레디트.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 크레디트.

‘영화를 다시 생각한다’는 주제로 열린 부천영화제의 포럼에 참석했다. 포럼 개최의 배경에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플랫폼의 확장세에 팬데믹까지 겹쳐 어려워진 영화계의 고민이 자리하고 있다.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를 기원적 근거로 제시한 발제문은 영화의 본질이 집단으로 체험하는 소비 형식에 있다고 역설했다. 그렇다. ‘집단’은 영화가 소비되는 구조뿐만 아니라 생산 형식을 아우르는 핵심 개념이다.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서정일 명필름랩 교수

영화는 여럿이 모여 보기 위해 우선 여럿이 모여 만들어야 한다. 본편 영화가 끝나고 올라가는 크레디트 자막에 점점이 박혀 있는 스태프들의 명단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크레디트는 영화 제작에 기여한 사람들의 리스트다. 영화가 공동 작업물이다 보니 누가 어떤 일을 담당했는지 엄격히 검증해 기록해야 한다. 관객들에게는 무의미한 자막일 수도 있겠지만, 영화인들에게는 중요한 경력 기록이자 보람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크레디트에는 출연 동물의 간식 담당자까지 올라간다. 다른 산업에서 찾아보기 힘든 영화의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전통이다.

언제부턴가 한국영화에서 ‘○○○ 감독작품’이란 수상한 크레디트가 등장했다. 할리우드에서도 잡음 많은 배타적 크레디트 ‘A film by ○○○’ 혹은 ‘A ○○○ film’을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연출자의 소유권을 명시한 것이다. 할리우드의 과시적 관행을 반성 없이 답습하고 있어 유감스럽다.

미국의 작가 조합에서 왜곡된 관행을 비판하며 ‘A film by’ 크레디트 사용을 중지해 달라고 감독 조합에 요구했다. 감독 조합은 타협안으로 각본과 연출을 겸했을 경우에만 ‘A film by’를 쓰도록 권고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여전히 적지 않은 수의 감독들은 영화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크레디트에 집착하고 있다. 자신이 연출한 대부분의 영화의 각본을 쓴 우디 앨런 감독은 ‘A film by’를 사용하지 않는 반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작품 번호까지 넣어 자신의 작품임을 과시하고 있다.

<멋진 인생>을 연출한 프랭크 캐프라 감독은 손대는 영화마다 흥행에 성공하여 ‘캐프라스 터치’라는 칭송을 받았다. 단짝 작가 로버트 러스킨이 어느 날 시나리오 한 권을 캐프라에게 보냈다. 기쁜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펼친 캐프라는 당황했다. 120쪽짜리 백지 뭉치였던 것이다. 캐프라는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한 문장을 읽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당신의 유명한 캐프라스 터치를 발휘해 보시지요.’ 영화의 영광을 감독이 독차지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영화의 성패는 감독의 면밀한 솜씨에 좌우된다. 수많은 스태프를 집중시키는 리더십과 각 분야의 예술적 재능의 ‘엑기스’를 추출하는 감독의 심미안이 없다면 영화는 산으로 오르기 쉽고, 몰개성한 영화들이 양산될 것이다. 또한 감독은 결과가 신통치 않을 때 모든 비난의 피뢰침이 되는 위험도 감내해야 한다. 제작자를 비롯, 영화에 참여한 스태프들은 감독의 역량에 의지하고 존경한다. 하지만 영화가 감독의 예술이라는 긍지는 함께 작업한 동료들로부터 얻는 월계관이다. 크레디트를 통해 감독 스스로 자기의 작품이라 주장하는 것은 공동 작업의 결과물인 영화의 본질에 대한 인식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다.

감독작품이란 크레디트는 은연중에 동료들의 의욕을 꺾고 상처를 준다. 이는 결국 한국영화 발전의 저해 요소가 되고 있다.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공동 작업자는 작가다. 한국영화의 약한 고리는 얕은 시나리오 작가층이다. 젊은 시나리오 작가들은 빈약한 원고료와 기약 없이 요구되는 수정 작업에 지친다. 제작자의 암묵적 승인하에 작가 크레디트에 이름을 얹는 일부 감독의 위력까지 겪고 나면 환멸을 안고 영화계를 떠난다.

위기에 처한 한국영화가 극복의 대안을 찾고 있다. 영화 제작의 주체인 제작자와 감독이 영화가 공동의 창작물이라는 인식부터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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