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열매읽음

김정수 시인
[詩想과 세상]붉은 열매

어두운 툇마루에 앉아 아버지가 담배를 피운다

형체는 보이지 않고 불빛만 보이다 사라진다

한 마리 반딧불처럼 움직인다

고요가 점점 타들어가는 붉은 열매다

당신이 고집한 외길이 터에 깃든다

버드나무 속에 깜박이는 반딧불이

마당으로 올라온다

가장 가까운 별자리를 개척하고

적막한 담장엔 늘 귀가 자란다

달빛에 당신의 모습이 나타난다

내가 어둠 속에서 붉은 열매를 찾을 때

불빛은 날아가다 돌아오는 마법을 부린다

누굴 저렇게 기다려본 적 있는지

아득한 땅에서 당신은

또 한 편의 노래를 뿜어낸다

조경선(1961~)

시인의 눈에 날이 어두워져도 불을 켜지 않고 “툇마루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아버지의 모습이 각인됐나 보다. 아버지의 형체는 보이지 않고 어둠 속에서 “불빛만” 반짝인다. 저녁밥도 들지 않고 자식을 기다렸으리라. 담배 불빛은 아버지의 또 다른 형상이다. 그 불빛이 사라진다는 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영혼은 “반딧불처럼 움직”여 떠난다. 하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멀리 떠나지 못하고, 자식도 아버지를 떠나보내지 못한다.

반딧불이는 깨끗한 하천이나 습지에 산다. 시인은 반딧불이를 통해 고집스레 외길을 걸어온 아버지의 삶을 반추한다. 아버지의 첫 기일, 날이 어두워지자 “적막한 담장”에 귀를 대고 애타게 아버지를 기다린다. 간절한 마음이 가닿은 것일까. “버드나무 속에서 깜박”이던 불빛이 날아가다 다시 돌아온다. 담배 불빛으로 시작해 반딧불이-붉은 열매-별자리로 이어지는 그리움이 애잔하다. 어쩌면 아버지의 자리에서 자식을 기다리는 나이 든 시인의 모습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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