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독자들이 빠진 ‘앎의 즐거움’

김태권 만화가
[창작의 미래] 요즘 독자들이 빠진 ‘앎의 즐거움’

독자의 취향이 변했다. 몇해 전만 해도 주인공을 죽도록 괴롭히는 것이 이야기 작법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론적 배경도 있다.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에 따르면 옛날 신화부터 20세기 영화 <스타워즈>까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고갱이가 한결같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죽음과 맞먹는 고통을 겪어야 강해진다는 ‘원형 신화’라는 개념이다. 말하자면 수천 년 동안 독자와 관객은 주인공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를 좋아한 셈이다. 반면 오늘날의 독자는 주인공이 고생하는 부분을 건너뛰고 싶어한다.

김태권 만화가

김태권 만화가

독자는 어째서 달라졌을까? 사회가 변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는데,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지점은 따로 있다. 오늘날의 독자는 옛날보다 많은 작품을 본다. 몇년 걸려 서사시 한 편을 외국어로 읽던 옛날 독자와 하루에 영화를 몇 편씩 감상하는 요즘 시청자가 같을 수는 없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나는 지난 칼럼에 썼다. 이번 글에서는 다른 문제를 살펴보려 한다. “옛날 독자가 느끼던 재미가 아니라면, 요즘 독자는 대체 무슨 재미를 느낄까?”

사라지는 전통 대 새로운 재미. 전통적 재미의 핵심이 주인공의 고통이었다면, 요즘 독자가 느끼는 새로운 재미란 어떤 것일까? “알아차리는 즐거움” 역시 독자의 재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앎의 즐거움 또한 원형 신화 못지않게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왜 초상화를 보고 즐거울까. 누가 그림의 대상인지 알아맞히는 재미가 한몫한다는 것이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다. 동양의 초상화 이론도 눈길을 끈다. 옛날 화가 고개지는 초상화를 그릴 때 그 인물의 정신세계까지 담아야 한다고 했다. 그림 속 인물의 됨됨이를 아는 사람일수록, 초상화 보는 재미도 커질 터이다.

“엉덩이를 한번 걷어차는 것은 우습지 않다. 그러나 백번 차면 관객은 폭소한다.” 미국의 코미디언인 마르크스 형제가 한 말이라고 들었다.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엉덩이 차는 장면을 반복하면 관객은 알아차린다. “저 사람은 엉덩이를 차는 사람이구나.” 발길질이 늘어날 때마다 관객은 자기 앎을 확인한다. “거 봐, 저 사람이 엉덩이를 또 찼지.” 유명인사의 캐리커처는 즐거움을 준다. 성공한 시트콤의 등장인물은 캐릭터가 뚜렷하다. 곧이어 무슨 짓을 할지 시청자가 예측할 정도다. 주인공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요즘 이야기가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만 확실하다면 독자는 아는 바를 확인하며 즐거울 터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은 흔히들 요즘 작품에 대해 지레짐작하는 것보다 무척 지적인 작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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