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 예술경영가

국내 첫 초대권 없는 공연장은 어디일까. 지금 봐선 엉뚱한 질문 같지만, 불과 20년 전만 해도 초대권 없는 공연장은 없었다. 말이 초대권이지 사실은 ‘공짜표’였다. 당시 일상화한 공짜표는 예술계에 만연한 ‘문화’였고 특권의 상징이었다. 직접 표를 사서 공연을 보는 경우가 드물다 보니 공연 티켓은 교환 수단의 구실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연시장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될 리 없다.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 예술경영가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 예술경영가

물음에 답할 때다. LG아트센터는 2000년 개관하면서 이 고질적 초대권 문화에 반기를 들었다. 초대권, 즉 공짜표 없는 공연장을 선언한 것이다. 두루 챙겨야 할 곳이 많은 기업의 공연장으로서 당시 이런 운영전략은 위험한 일이었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정말일까. 주변의 의심이 뒤따랐다. 그런 우려를 불식하고 파격적인 LG아트센터의 ‘무공짜표 극장 선언’은 적중했다. 개관 초기 명문 극장으로 자리 잡는 데 이 전략은 주효했다. 신뢰는 자산이 됐다.

서울 역삼동에 있는 LG아트센터가 지난 15일 연극 <코리올라누스>를 끝으로 기획공연의 막을 내렸다. 다음달 개막하는 장기 대관 뮤지컬 <하데스타운>이 끝나는 내년 봄, LG아트센터는 서울의 서쪽 강서구 마곡으로 이전한다. 이사를 위해 기획공연을 일찍 마무리한 것이다. LG그룹 강남 사옥의 부속공간으로 출발한 22년 극장의 역사가 저물고 있다.

공연은 물론 문화예술계로 넓혀 봐도 LG아트센터는 연구 대상이다. 과감한 초대권 철폐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에 끼친 영향이 넓고 깊어서다. 특히 한국 공연문화의 질적 전환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극장 경영의 역사를 ‘LG아트센터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 이들도 있다. 캐나다 출신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는 곧 메시지다”라고 했다. 미디어인 극장이 발신하는 내용은 메시지가 돼 극장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 이 극장이 가치를 높인 근거와 사례는 꽤 풍부하다.

첫째, 국내 첫 장기 공연의 시금석이다. 민간극장이 거의 없던 개관 당시, 공연계를 주도하던 국공립 공공극장의 대관 일수는 길어야 2주 정도였다. 민간극장 LG아트센터가 이 틀을 깼다. 개관 이듬해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무려 9개월 동안 대관 공연을 펼쳤다. 전례없던 최장 대관 덕에 국내 초연한 <오페라의 유령>은 24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매출액은 192억원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뮤지컬 산업화가 촉발됐다. 한 해 기획공연 프로그램 전체를 한꺼번에 발표하고 운영하는 ‘시즌제’도 처음 도입했다.

둘째, 프로그램 특화 전략이다. 세계적인 당대 최고 예술가들의 동시대 작품 소개, 이걸 사명으로 삼았다. <오페라의 유령>처럼 말로만 듣고 글로나 접하던 작품을 직접 극장 현장에서 볼 수 있게 됐다. 굳이 외국에 나가 볼 필요가 없어졌다. 공연 프로그램에 유독 국내 초연이 많은 이유다. 독일 무용가 피나 바우슈를 비롯해 레프 도진(러시아), 매튜 본(영국), 토마스 오스터마이어(독일), 로베르 르파주(캐나다) 등 세계적 거장들이 소개됐다. 이로써 진작 브랜드 극장의 입지를 굳혔다.

셋째, 주목해야 할 게 리더십이다. LG아트센터는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을 명분으로 내세운 기업극장이다. 아무리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 강조되는 때라지만, 문화예술 공헌 활동은 이윤에 단련된 전문경영인들의 눈엔 우선순위 밖이다. LG아트센터에는 이런 외풍을 막으면서 예술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옹호하는 견고한 오너십이 있었다. 당신 스스로 표를 사서 본 고(故) 구본무 회장의 역할이 지대했다.

특정한 인물과 사건이 다른 시대와 뚜렷이 구별될 때 우리는 ‘시대(era)’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21세기 한국 공연예술 문화의 전환기에 끼친 막대한 영향력으로 볼 때, LG아트센터의 역삼동 22년은 감히 ‘역삼시대’로 칭할 만하다. 세계적인 거장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마곡의 신축 극장에서 LG아트센터가 펼칠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LG아트센터가 역삼동을 떠나면 그 극장은 건물주인 GS그룹이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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