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그리고 법조의 시간

이범준 사회에디터

어느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배석판사와 밥을 먹으면서 가족 중에 법조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남편이 변호사라고 답하니, 그러면 법조인은 없느냐고 되물었다. 사전을 뒤져보면 변호사는 법조인이 아니다. 재조(在曹)에서 조는 나라, 관직이란 뜻이고 재조는 관리라는 의미가 된다. 재야(在野)는 관직을 그만뒀거나 거치지 않은 사람이다. 이 재조 중에 하나가 법조(法曹)다. 따지자면 판사나 검사만 법조인이다. 그러다 의미가 넓어져 변호사, 로스쿨 교수도 포함됐다.

이범준 사회에디터

이범준 사회에디터

법조에서 재조와 재야의 간격은 넓다. 갈림길인 사법연수원은 판사(그리고 검사)를 선발하는 곳이다. 재조 경험이 없는 한 유명 변호사는 “사법연수원은 판사가 되는 사람에게 무한한 성취감을,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깊은 열등감을 안겨주는 곳”이라고 했다. 판사·검사를 뽑는 기준은 연수원 성적이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하고도 1982년 판사임용에서 탈락한 사람이 문재인 대통령이다. 1975년 박정희 유신 반대시위에 나섰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는 것이 이유다.

문 대통령에게 재조는 특별한 의미다. 갈 수 있지만 가지 못한 곳이고, 자부심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대상이다. 어쨌든 재조를 경험하지 못했고 깊숙이 알지 못한다. 재조 경험이 없는 문 대통령이 재임 기간 자신 있게 발탁한 세 법조인이 최재형 전 감사원장과 윤석열 전 검찰총장, 그리고 김명수 대법원장이다. 최 전 원장은 사법연수원장으로 있다가 감사원장이 됐고, 윤 전 총장은 지방검찰청 검사장을 하다가 검찰총장이 됐다. 김 대법원장은 지방법원 법원장에서 대법관을 거치지 않고 대법원장이 됐다.

문 대통령은 이 법조인들을 웬만큼 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온 세상이 알듯이 그러지 못했다. 최 전 원장과 윤 전 총장은 스스로 임기를 중단하고 야권 대선 주자가 됐고, 김 대법원장은 재야 변호사를 판사로 뽑아 재조를 만드는 법조일원화 축소를 추진 중이다. 특히 대선에 나선 두 사람은 문 대통령이 헌법을 파괴했다고 얘기하면서, 헌법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하지만 피의자가 목숨을 던지도록 수사를 벌이며 적법절차라는 헌법을 넘나든 사람, 군사정부에서 판사 생활을 하면서도 위헌심판 한번 청구해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두 사람 모두 법과대학에 다니면서 헌법을 읽었겠지만, 국민이 쟁취한 정치문서인 헌법을 수호하는 것과는 먼 삶을 살았다. 오히려 헌법이 보호하는 직업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헌법의 혜택을 입었을 뿐이다. 살면서 한 차례 선출된 적도 없는 두 법조인은 왜 대통령이 되려는 것일까. 비슷한 두 사람이지만 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최 전 원장은 사직서가 수리되기 무섭게 국민의힘에 입당했고, 윤 전 총장은 지지자들도 지칠 만큼 단계마다 뜸을 들이고 있다. 마침 두 사람을 취재해오면서 기억나는 일이 있다.

10년 전 나는 차기 대법관이 누구인지 알려고 동분서주했지만 자주 빗나갔다. “대법관을 맞히려 하지 말고 좋은 인물을 소개하면 어떠냐”는 조언을 들었다. 그래서 찾아낸 사람이 최재형 판사다. “사법연수원 시절에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동료를 2년간 업어서 출퇴근시킨 일화로 유명하다. (중략) 후배들이 믿고 따르는 법관 중 한 명이다.” 이런 기사를 냈지만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대법원에 추천서를 낸 사람이 없었다. 다들 누군가 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액션이 없으니 결과가 없었다. 이 얘기를 최 판사에게 들었다.

이 무렵 대검찰청 기자단 간사를 하면서 윤석열 중수2과장도 더러 만났다. 그에게 들은 얘기 가운데 2003년 대선자금 수사 과정이 있다. 야당 유력 정치인이 중수부에 불려왔는데 오자마자 자백했다고 한다. 개인 비리가 있던 자신을 보호하려 여러 기업에 정치자금을 요구한 사실을 털어놨다. 하지만 검찰은 밤늦게야 내보내고 다음에도 또 불렀다. 수사할 것은 없었지만 당과 여론에 비치는 모습을 고려한 것이다. 피의자를 곤란하게 하지 않아야 계속 협조받는다는 계산이었다. 상대를 공략하는 윤 검사에게 시간은 중요한 변수였던 것이다.

법조는 재조 중에서도 좁은 울타리다. 이곳 경험밖에는 없는 두 사람이 정치에 나섰다. 변호사로 산전수전 다 겪은 노무현과 문재인, 여러 요직을 거치고 각종 선거까지 치른 이회창과도 다를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 앞에 법조(法曹)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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