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에라델푸에고 섬의 비버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아르헨티나 정부는 1964년에 캐나다로부터 비버 50마리를 수입해서 ‘티에라델푸에고’(Tierra del Fuego)라는 남쪽 끝 섬에 방목했다. 캐나다 서식지와 비슷한 이 섬의 울창한 숲에서 비버를 키워서 비버 모피산업을 육성할 목적이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그런데 기대와 정반대로 비버 방목은 티에라델푸에고 국립공원의 울창한 숲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북미지역과 달리 비버의 천적인 곰이 없었기 때문에 비버의 개체 수는 급속히 늘어났다. 비버는 나뭇가지 등으로 집을 만들고 나무껍질을 먹기 위해 나무의 밑동을 갉아서 나무를 쓰러뜨린다. 그런데 북미와 달리, 남미의 많은 나무들은 잘린 밑동에 묘목을 심어 나무를 재생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비버가 훼손한 삼림은 회복 불능한 상태가 되었다.

천적의 존재 여부와 밑동에 묘목을 심는 숲 관리의 가능성과 같은 생태 환경적 맥락은 무시하고 서식환경이 비슷하다는 점 하나만 생각하고 비버를 수입해 방목한 정책 실패의 결과는 황당하고 처참한 환경파괴였던 것이다.

경제정책도 마찬가지이다. 특정 사회·경제의 구조적 맥락이나 특정 시점에서 정책 환경적 맥락을 무시한 정책은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부정적 효과만 낳기 십상이다. ‘한 권의 책을 읽은 사람’이 범하는 오류와 실수도 사실은 ‘맥락(context)’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올해 2차 추경이나 20대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을 보면 ‘한국 사회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한탄과 걱정을 할 수밖에 없다.

2차 추경으로 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지급하느냐 하위 80%까지만 지급하느냐를 두고 여당과 기재부의 줄다리기 끝에, 하위 88%까지 지급하기로 여야가 합의해 추경 수정안을 의결했다. 그러나 2차 추경은 문재인 정부의 정책 결정과정의 총체적 난국과 한국 정치의 파탄을 극명하게 보여줬을 뿐이다. 2차 추경안이 국회에 제출된 이후에 코로나 4차 대유행이 본격화되었고, 정부의 기대와 달리 ‘굵고 짧은’ 방역대책으로도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정책 환경적 맥락의 변화에 따라 추경의 쓰임새나 재원에 대한 평가가 바뀌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추경 최종안에서는 소상공인의 기존 피해를 보전해 주는 희망회복자금 4조2000억원과 소상공인 손실보상법에 따른 향후 소요액으로 1조원 정도가 책정되었을 뿐이다. 이에 반해 하위 88%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으로 지급하는 예산 규모는 11조원이나 된다. 또한 늘어난 1조9000억원의 추경은 추가적 국채 발행 없이 기금이나 국고채 이자 조정으로 마련한다고 한다.

코로나 4차 대유행으로 소상공인의 피해는 훨씬 크고 지속될 개연성이 높고, 세수도 예상보다 적어질 수 있다. 소상공인의 도산은 엄청난 사회문제와 금융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지금은 무엇보다 소상공인에 대한 지원에 집중할 때이다. 그럼에도 코로나19에 대한 전망 및 방역정책과 경제정책의 연계라는 합리적 정책 논의는 아예 없고, 전 국민 재난지원금이라는 도그마 또는 표(?)퓰리즘이라는 잔머리 굴리기에 매몰된 정치만 보인다.

이에 반해 선거라는 맥락에 맞는(?), 대선 여론조사 선두권 후보들에 대한 신상 검증과 상호비방은 점입가경이다. 다수의 언론이 경쟁하듯이 여론조사 결과를 쏟아내고 있으나, 정작 비전과 정책에 대한 검증은 후순위로 밀려나 있다. 말초적 흥미 위주의 검증과 상호비방을 다루면서 누가 앞섰다거나 누가 따라붙었다는 식의 야바위 놀이가 국민의 이목을 잡는 데 더 유리하다는 상업적 계산이나 혹 정치적 의도를 가진 편들기에 언론이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대통령 선거는 5년에 한 번씩 한국 사회와 경제를 되돌아보고, 우리의 미래를 위한 어젠다를 설정하는 순기능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 후보자는 우리 사회에 대한 문제 진단, 미래 비전, 현실에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주요 정책을 국민에게 설명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런 정책 경쟁은 여전히 뒷전이고, 발표된 정책도 우리 경제·사회적 맥락에서 어떤 효과를 낼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운 추상적 수준의 당위론적 주장에 그치고 있다.

대부분 대선 후보자가 명확하고 일관성이 있는 비전과 정책을 아직도 마련하지 못한 것은 한심하고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우리 경제·사회의 구조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대안을 제시할 누군가가 어디에 여전히 있을지 모른다는 한 가닥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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