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에서 빛을 보는 사람들읽음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경계선 너머를 꿈꾸지 않을 때
정신은 늙어가기 시작한다
인간 정신의 숭고함은 언제나
비범한 고통을 통해 발현된다
정신의 위대함 없다면 역사는 쇠퇴

히말라야의 브로드피크를 등정한 후 하산길에 실종된 김홍빈 대장은 결국 그 무심한 설산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그는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최초의 장애인이라는 타이틀보다 더 소중한 것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인간의 한계를 초극하려는 도전 정신이다. 그는 일찍이 북미 대륙의 최고봉인 매킨리 단독 등반 도중 조난 사고를 당해 열 손가락을 다 잃었다. 잠시 암울한 시간을 통과해야 했지만 그는 자기 삶의 조건을 씩씩하게 받아들였고, 불굴의 도전 정신을 발휘했다. 일곱 대륙의 극점에 도전했고, 마침내 히말라야 14좌 완등이라는 꿈을 이루고 말았다. 사고였지만 그는 마치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며칠 동안 그의 생환 소식을 기다리면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문장을 떠올렸다. “어두운 심연으로부터 와서 어두운 심연에서 끝을 맺으면서 우리는 반짝하는 그 사이의 삶을 부른다. 우리가 태어나자마자 되돌아감은 시작되고, 전진과 후퇴는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는 매 순간 죽는다.” 조금 불길하긴 했지만 이게 삶의 진실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심연과 심연 사이에서 반짝하는 사이, 바로 그곳에서 우리 삶이 빚어진다. 심연은 어떤 설명도 불가능한 인식의 절벽이다. 삶도 그러하고 죽음도 그러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심연을 짐짓 외면하며 산다. 심연을 본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심연을 보는 순간 인간은 벼랑 끝에 선 듯 현기증을 느낀다. 심연을 응시한 후에 깊은 침묵의 세계 속으로 침잠하는 이도 있고, 광기에 사로잡히는 이도 있다.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은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는 이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심연 앞에서 눈을 감는다. 심연의 공포를 마주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비교적 안전하다. 요령 있고 신중한 이들은 안전지대에 머물 뿐, 경계선 너머를 꿈꾸지 않는다. 그때 정신은 늙기 시작한다. 문틈으로 공기가 스며들어오듯, 먼지가 소리 없이 쌓이듯 일상은 그렇게 우리 정신을 잠식하여 다른 삶을 꿈꾸지 못하게 만든다. 비속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앙버티며 사는 동안 우리 삶의 지평은 점점 좁아진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하계올림픽 경기를 보며 감탄한다. 젊은 날에는 승자들에게 눈길이 많이 갔지만 이제는 이기든 지든 자기 한계를 넘어서려는 이들의 모습이 다 아름다워 보인다. 몸과 마음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탐색하는 그들의 장한 도전 덕분에 우리 문명은 활력을 얻는다.

세상에는 인간 정신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있다. 전쟁의 세기인 20세기에 ‘모든 생명은 살기를 원하는 생명’이라는 평범한 진실을 통해 새로운 생명윤리를 제시한 알베르트 슈바이처, 제국의 가혹한 폭력을 겪으면서도 비폭력적 저항을 통해 압제자나 피압제자가 함께 해방되는 길을 제시했던 마하트마 간디 같은 사람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더라도 고귀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위험 속으로 들어간 이들도 인간 정신을 고양한 존재라 해야 할 것이다. 인간 정신의 숭고함은 언제나 비범한 고통을 통해 발현된다. 비범한 고통이란, 겪을 수밖에 없는 수동적 고통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고통이다. 약자들을 삼키는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 그 격랑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의 제단 앞에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는 바로 그러한 진실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정치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대통령의 꿈을 꾸고 있는 이들은 저마다 왜 자신이어야 하는지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들에게 정신의 숭고함을 요구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비루한 정신이 나라를 대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어찌 정치인들만의 문제겠는가. 우리 역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초월의 관점에서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는 종교조차 정신의 위대함을 보이지 못한다면 역사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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