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 꿈꾼 세상

정제혁 사회부장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문제로 시비가 붙었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이낙연 전 대표를 공격하는 소재로 들고나왔다. 새천년민주당 소속이던 이 전 대표가 노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찬성표를 던진 게 아니냐는 것이다. 새천년민주당은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자민련과 노 대통령 탄핵을 공동 추진했었다. 이 전 대표 측은 “반대표를 던졌다”고 했다. 표결에 참여한 195명 중 2명이 반대표를 던졌는데, 그중 한 명이 이 전 대표라는 것이다.

정제혁 사회부장

정제혁 사회부장

얼마 전 윤호중 민주당 원내대표는 언론중재법과 관련해 “‘논두렁 시계’ 같은 가짜뉴스, 그것을 받아쓰기 하던 언론의 횡포, 여기에 속절없이 당하셔야 했던 것이 노무현 대통령”이라며 “그렇게 당하셨던 것처럼 우리 국민들도 언론개혁·검찰개혁 한마디도 못하고, 언론·검찰에 당해야만 한다는 것이냐”고 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노무현 정부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경직된 언론 환경을 구축하겠다는 것인가”라고 하자 반박하며 한 말이다.

대선을 7개월여 앞두고 정치권이 노 전 대통령을 자주 소환한다.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민주당의 적통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흐름은 한 시대에서 다음 시대로 넘어갈 때마다 분화와 재통합을 거듭했다. ‘김대중 정신의 계승’을 주장하는 이들 일부는 국민의당으로 떨어져 나갔다. 지금 여권 주류의 뿌리는 ‘노무현 시대’이다.

2004년 총선 때 탄핵 역풍에 힘입어 국회에 대거 입성한 ‘탄돌이’들은 여권 중진으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문재인 대통령이 ‘노무현의 친구’이자 ‘노무현의 비서’로 정치에 입문했다. 김대중 시대에서 노무현 시대로 넘어갈 때 민주당 분당 등을 거쳐 주류가 교체됐다. 반면 노무현 시대와 문재인 시대는 인적 연속성이 대체로 유지된다. 김 전 대통령이 여권의 역사적 뿌리라면 노 전 대통령은 신체적 뿌리에 해당하는 셈이다. 노무현 시대가 ‘적통 논쟁’의 무대가 되는 배경이다. 노 전 대통령이 악의적 언론 보도와 정치검찰의 희생자라는 점도 여권이 개혁 국면마다 노 전 대통령을 호명하는 명분이다. ‘지키지 못했다’는 부채의식과 ‘다시는 잃지 않겠다’는 결의가 개혁의 심리적 동인이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저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맏형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구시대의 막내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시대를 앞서 왔다. 양극단으로 치닫는 정치를 보면서 대연정을 제안한 노 전 대통령의 혜안과 통찰, 고뇌를 곱씹는다. 노 전 대통령은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를 내면화한 민주주의자였다. 초선 의원 노무현은 1988년, 그 유명한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노동3권을 옹호하며 “(노동3권) 이를 인정하지 않을 때는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나서 자본주의 구조 자체를 뒤엎어 버릴 위험이 있고 그 소용돌이에 휩쓸려서 상대주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민주주의 제도마저 파괴될 위험이 있어서 이를 제도 안에 수용한 것 아닙니까”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우상과 도그마를 거부했다. ‘우리가 옳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행동도 옳다’는 쪽보다는 ‘옳은 행동을 통해 우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쪽에 가까웠다. ‘옳음’은 내가 딛고 선 입각점에 따라 자연히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안마다 입증할 것이었고, 이 끊임없는 검증을 통해 내 입각점 역시 지속적으로 교정될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에게 민주주의는 곧 ‘민주주의적 과정’이었고, 연역식이 아니라 귀납식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극우냉전주의, 지역주의라는 우상에 맞서 온몸을 던져 싸운 배경과 논리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여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시시때때로 호명하지만 ‘노무현 정신’을 그만큼 깊게 고민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현 정부가 추진했거나 추진 중인 각종 개혁의 방향, 추진 방식이 ‘노무현 정신’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대로 된 제도개혁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간단한 사고실험이 있다. 최악의 정적이 결과물을 쥐고 흔들어도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 제도개혁이라면 괜찮다. 내 손에 있을 때만 좋은 개혁은 어떤 선의로 포장해도 정략적 개혁일 뿐이다. 그 자체로 퇴행일 뿐 아니라 더 큰 반동의 무기로 활용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지금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은 어떤가.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노무현 정신’에 대한 제대로 된 ‘적통 논쟁’이 필요한 때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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