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피엔딩만 있겠냐읽음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장대익의 진화]어떻게 해피엔딩만 있겠냐

“이제 더 이상 쏠 화살이 없다.” 김우진 선수는 아예 인생의 화두를 쏴버린 것 같다. 이토록 멋진 말들을 남긴 올림픽 선수가 또 있었을까 싶다. 2020 도쿄 올림픽 남자 양궁 개인전 8강전에서 1점 차이로 석패한 김 선수의 인터뷰 내용이 연일 화제다. 뭔가 다른 레벨의 대답이었기 때문이다(혹시 어디 명언 학원 같은 데를 다니셨나?). 그의 말들을 차례로 감상해보자.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충격적인 결과로 대회를 마무리하게 됐다”는 기자의 질문에 그가 반문한다. “이게 충격인가요? 하하. 스포츠는 결과가 정해져 있지 않아요. 언제나 바뀌고, 그래서 열광할 수 있는 대상이죠.” 우선 그는 국민들께 “죄송하다”는 표현을 하지 않았다(이게 가장 신선했다). 오히려 그런 표현이 나올 것을 예측하며 던진 상투적 질문에 당당하게 답한다. “그렇게 속상한 단어(“충격”)를 쓰시면 저도 슬프죠.” 이 대답을 보면 그는 국민의 실망에 공감하지 못하는 선수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진한 성적 때문에 고개를 푹 숙이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선수는 더더욱 아니다.

남을 위해서만 또는 남의 시선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인생은 행복과 거리가 멀다고 알려져 있다.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국가대표로서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해 뛰는 것은 아름답지만, 그런 동기만으로는 4년마다 즐겁게 훈련하기는 힘들다. 개인의 내적 동기가 필요하다. 매일매일 훈련과 경기를 즐길 수 있는 재미와 성장의 기쁨이 필요하다. 이런 동기로 다져진 이들에게는 ‘국가대표로서 경기에서는 졌지만 국민에게 미안하지는 않음’이 가능하다. 올림픽 스포츠의 기본 정신이 국가 간 메달의 색깔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이기주의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요, 뛰어난 과학저술가이기도 했던 리처드 파인먼은 노벨상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영예를 좋아하지 않는다. 과학적 발견에 대한 즐거움 자체가 이미 내가 받은 상이다.” 그는 국가, 자신이 속한 대학, 가족을 위해 양자역학을 연구하지 않았다. 물리학 법칙이 드러내는 자연세계의 아름다움에 매일매일 매료되었을 뿐이다. 겨울이 없는 자메이카에서 봅슬레이팀을 만들어 동계올림픽에 출전하는 이야기를 영화화한 <쿨러닝>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금메달은 멋지죠. 하지만 그것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있다 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김 선수는 8점을 쏜 화살에 대해 집요하게 묻는 기자를 또 한번 당혹스럽게 만든다. “내가 쏜 거다. 8점을. 누군가가 쏜 게 아니다. 내가 잘못 쏜 거다…. 오전에는 경기를 잘한 거고, 오후에는 경기를 못한 거다.” 이때에도 실수를 인정하고 아쉬움을 표현했을 뿐, 결코 고개를 떨구지 않았다. 국민에게 미안한 일을 하진 않았으니까. 오히려 “그게 삶이 아니냐, 어떻게 해피엔딩만 있겠냐”며 인생의 화두를 기어코 쏜다. 결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할 수 없는 대답들이다.

올림픽에 관한 수많은 격언 중에 올림픽은 “4년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하는 것”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것을 ‘올림픽에서의 승리를 위해서는 꾸준한 훈련이 필수적’이라는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김 선수가 쏜 화두를 제대로 포착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화두란, ‘과정(매일매일)을 즐기기(성장) 위해 목표(올림픽)가 있는 것’이라는 게 아닐까?

김 선수의 또 다른 화살은 경쟁에 대한 고정관념을 향해 날아간다. “화살 다 쐈다. 이제 더 이상 쏠 화살이 없다. 돌아가서 부족한 것 채우고 3년 뒤 파리 대회 위해서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다.”

이때 그는 상대방을 언급하지 않는다. 남들과 경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경쟁하는 사람이다. 오늘의 부족함을 채워 내일을 준비하겠다고 한다. 자신의 과거와 경쟁함으로써 매일매일 성장하려는 사람들의 경기, 이것이 진정한 스포츠다.

테니스 메이저 3개 대회를 이미 우승하고 이번 올림픽에 금메달을 꿈꾸며 도쿄에 온 노바크 조코비치는 의기양양하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수한 선수 100명은 체력에서 큰 차이가 없다. 중압감을 견디고 결정적 순간에 놀라운 결과를 만드는 힘은 정신력에서 나온다.” 현재 테니스 랭킹 1위인 그는 엊그제 빈손으로 이번 올림픽을 마감했다. “이게 삶이다. 어떻게 해피엔딩만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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