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박탈감읽음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검진을 꼭 받으시기 바랍니다.” “금연 결심을 환영합니다.” 애틋할 뻔했다. 1577-1000. 건강보험료 체납 안내 메시지도 와서, 애틋하지는 않았다. 전화도 걸어봤다. 금연프로그램 이수 인센티브를 신청했고, 건강보험료가 갑자기 올라 항의도 했다. 번호를 누르며 내가 메타넷엠플랫폼이나 효성아이티엑스와 같은 회사로 전화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건강보험공단으로 전화를 했는데 건강보험공단 직원이 받은 게 아니었다니….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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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누가 받든 안내가 충실하면 그만일까. 그런데 회사는 안내가 충실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통화는 짧게, ‘콜 수’는 많이. 최저임금 수준의 기본급에 상담사들을 묶어놓고 경쟁을 시켰다. 상담사들은 ‘콜 수’ 압박 때문에 화장실도 편히 다녀오지 못하고, 동료들에게 미안해 조퇴나 휴가도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회사는 오래 일한 숙련된 상담사를 원하면서도 쌓인 경력만큼 기본급을 쌓아주지는 않았다. 어디에 항의해야 할까?

상담과 민원 처리는 건강보험공단의 업무다. ‘09시부터 18시까지’라고 공단이 상담 시간을 안내한다. 상담사들은 공단의 전산시스템에 로그인해 민원인의 문의와 요청을 해결한다. 공단이 정한 인건비가 임금 상한이고 몇 명이 일할지도 공단이 정한다. 공단은 11개 업체로부터 ‘콜 받는 기계’를 빌린 듯 굴지만 고객센터 노동자는 ‘상담 일을 하는 사람’이다.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싸우고 교섭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가 국민건강보험공단 또는 그 이사장이어야 함은 자명하다.

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이 2차 파업에 나섰던 6월, 김용익 이사장은 단식을 했다. 삼성전자서비스센터 노동자가 파업을 하는데 이재용이 단식을 한 셈이다. 고객센터 노동자 직접고용의 필요성을 이만큼 잘 보여줄 수 있을까. 노동력을 사용하는 자가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으니 사용자라는 자각도 사라진다. 김 이사장은 ‘비정규직’이 문제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왜 문제인지는 모르나보다. 공단 일을 하는데 공단 직원이 아닌 것처럼 고용 형태를 왜곡해 노동자 권리를 무산시키기 때문이다. 비정규직의 오랜 투쟁으로 우리는 정규직화가 효과적 권리 보장 방법이라는 것을 안다.

문재인 정부도 그래서 포부를 밝혔을 것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늘 필요하고 앞으로도 지속될 업무는 기간을 정하지 않고 직접고용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간접고용을 정규직 전환 대상에 포함시키며 앞선 정부들보다 한발 더 나아갔다. 그러나 정규직화라는 대의에서 노동자의 권리는 사라지고 고용형태만 남았다. ‘자회사 전환’이라는 또 다른 간접고용이 정규직화로 치부되었다. 그러니 공단 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런 팻말을 든다. “사기업 정규직인 그들이 왜 비정규직인가요?”

이름도 낯선 회사 직원이 공공기관 직원이라고 우긴다는 말이다. 능력과 노력을 쏟아부어도 닿을락 말락 한 자리를 누군가 거저 얻을 때의 박탈감을 아느냐 한다. 억울한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모르지도 않겠다. 스펙을 쌓고 시험 준비 동안 불안하게만 흘러가던 당신들의 시간은 소중하다. 능력이든, 노력이든, 그들이 충분히 보상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보상해야 할 이유는 없다.

칼퇴, 연차와 휴직 사용, 안정적인 고용, 근속과 숙련에 따른 대우 같은 것은 보상이 아니라 노동자의 권리다. 비정규직이 노동자의 권리를 포기한다고 정규직에게 보상이 될 리도 없거니와, 모두가 누려야 할 권리를 보상이라고 믿는 이들이 공공기관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암담하다. 박탈당한 감각이 박탈하는 감각으로 위태롭게 옮겨가고 있다.

중재자인 듯 단식을 한 이사장이나 대의만 되뇌며 권리를 외면하는 정부는 제자리 좀 찾으시라. 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노동자들의 3차 파업이 한 달을 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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