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먼저다읽음

이채린 자유기고가

팬데믹 후 처음으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갔다. 미리 온라인으로 시간 예약 후, 마스크를 쓰고 입장할 수 있었다. 가장 인기 있는 전시는 진보적 화가 앨리스 닐의 ‘사람이 먼저다(People Come First)’였다. 복도 맨 끝까지 긴 줄이 이어진 가운데 안내원들은 “기다려도 입장을 보장 못한다”고 계속 경고했다. 인물화에 신체뿐 아니라 영혼과 역사까지 관통해 담아온 뉴요커인 그녀는 주류 예술계에 끼지 못한 채 아웃사이더로 살다 74세가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나에게는 사람이 먼저”는 인권운동과 페미니즘에 관심을 둔 공산당원이었던 그녀가 한 말로, 질곡의 삶을 살며 그린 어려운 이의 초상화들은 팬데믹과 대선, 흑인인권운동 등 지금 미국 사회의 흐름과 맞닿아 울림을 준다.

이채린 자유기고가

이채린 자유기고가

진자가 한쪽으로 지나치게 움직이면 반작용이 일어나듯,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등장으로 좌로 움직이던 미국 사회의 진자는 도널드 트럼프 시대에 최우단으로 치달으며 그간 억눌렸던 각종 차별의식을 극단으로 표출하다가, 다시 조 바이든 당선과 흑인인권운동 등으로 왼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항상 그랬듯 뉴욕은 가장 왼쪽에 서 있다.

뉴욕에선 1980년 동성애 합법화에 이어 2011년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었다. 그 직후, 사촌의 동성결혼식에 아이를 데려가야 할지 또 어떻게 설명을 해줘야 할지 고민하던 친구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너무나도 흔하고 당연한 일이 되었다. 지난 6월 말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는 운전면허증의 성별표기에 남성(M), 여성(F)에 더해 X(제3의 성, 논바이너리)를 포함하는 법안에 사인했다. 출생증명서에는 이미 2019년부터 포함됐다. 화장실 사용에 대한 고교생 트랜스젠더 개빈 그림의 6년간에 걸친 소송도 지난달 끝나 대법원은 “성 정체성에 맞는 화장실을 사용하라”고 결론지었다. 오바마 시대에 승소했지만 트럼프 시대에 좌초되었다가, 결국 바이든 시대에 최종 허가됐다.

평소 소위 ‘쿨하다’고 자부하는 광고기획자인 친구 대니얼은 최근 놀랐던 일을 털어놓았다. 회사 화장실에서 옆 부서 샌디를 만나서였다. 최근 성전환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남자 화장실에서 보니 당황한 데다 개명했다는 샌디의 남자이름도 생각이 나지 않아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하고 나와버렸단다.

요즘 패션 브랜드마다 남녀공용옷을 출시하거나 확대하고, 광고 전면에 다양한 인종과 체형을 가진 옆집 사람 같은 모델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뉴욕에서 여성성이나 남성성을 강조한 패션은 이제 좀 촌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만나면 불편해지는 마음이야 전 세계 어디든 같지만 이를 대하는 예의나 행동방식은 다르기 마련인데, 미국에서는 ‘모르는 척, 태연한 척’이 기본이다. 미국, 특히 뉴욕은 세상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을 마음껏 드러내며 사는 곳이다 보니, 토종 한국인인 나도 이제 웬만한 개성에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거나 언급하는 등 ‘미국식 예의에서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게 단련되었다. 미국은 지금 인종, 성별, 가치, 문화의 변화를 목도하고 있다. 다음 세대에게는 너희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선 여러 모습의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가 될 거라 말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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