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의 관뚜껑을 덮어라

양권모 편집인 양권모

심지어 소 잡는 칼이냐, 닭 잡는 칼이냐를 두고 다툰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인 이재명 경기지사와 이낙연 전 대표의 싸움이 날로 치졸해지고 있다. 능력 배틀이라면 국무총리·당대표(이낙연)와 경기지사(이재명)로서 거둔 성취를 놓고 견줘야 한다. ‘누가 더 큰 칼을 찼었느냐’를 대거리할 일이 아니다. 집권여당의 경선에서 노선과 비전 경쟁은 간데없다. 미래 담론이 실종된 자리에 과거 파헤치기와 저열한 인신공격만 가득하다. 17년 전 노무현 대통령 탄핵 표결까지 끌어들여 적통과 서얼을 가리는 시대착오적 족보 논쟁을 벌이더니, 급기야 수천년 전 ‘백제’를 지역주의로 소환했다.

양권모 편집인

양권모 편집인

거꾸로 가는 과거 논쟁이 지배하다보니 기본소득을 제외하곤 변변한 정책과 가치 논쟁을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다. 서슬퍼런 적의와 인신공격, 낙인찍기, 무차별적 네거티브로 얼룩지면 경선 후 소위 ‘원팀’은 물 건너가기 십상이다.

최악은 경선 후보들이 관뚜껑을 열고 부활시킨 지역주의 망령이다. 이재명의 ‘백제 발언’을 이낙연 측이 ‘호남불가론’으로 규정하고 대응에 나서면서 악마적인 지역주의가 민주당 경선의 복판으로 진입했다. 백제, 호남불가론, 영남후보론 등 자극적인 언어를 통해 소환된 지역주의 그림자가 너무 퇴행적이다. 지난 지방선거와 총선을 거치면서 전국정당 입지를 굳힘에 따라 민주당에서 사라졌던 지역주의다. 지역주의와 평생을 싸운 김대중, 노무현을 배출한 민주당에서 다시 영남후보론, 호남불가론이 운위된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지역주의를 정치적 자원으로 이용해 선거에서 이득을 보려는 전략 자체가 패악적이다.

이재명의 ‘백제 발언’을 곧장 호남불가론으로 직결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당내 경선이 중요한 시점에서 호남 민심을 자극할 지역주의를 부각시킬 까닭도 별로 없다. 하지만 ‘영남 역차별’ 발언에 이어 ‘지역적 확장력’을 거론한 것부터가 중대한 잘못이다. 한국 정치의 괴물인 지역주의는 건드리면 폭발하는 휘발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지역적 확장성이 도마에 오르는 순간, 호남 출신 후보들은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지긋지긋한 지역주의 프레임이 씌워지면 당내 경선은 물론 본선에 나서게 될 경우 심각한 굴레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은 민주당과 국민의힘 후보 간 양자 대결 가능성이 높고, 진영 간 대결 구도가 강할 터이다. 지역을 볼모로 한 선거전이 불붙을 수 있는 토양이다. 민주당 경선전에서 불거진 지역주의 논란이 위험한 것은 이 불씨를 자극할 소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제 발언 공방 이후 이재명의 호남 지지율은 크게 하락하고, 이낙연은 소폭 상승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이재명에게서 이탈한 호남 지지층이 온전히 이낙연에게로 옮겨가지 않고 있음이다. 네편 내편을 떠나 선거에서 지역주의를 이용하는 것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 호남정서에 자리하고 있다. 지역주의 최대 피해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켜본 데서 쌓인 것이다. 이렇게 지역주의 공방이 계속될수록 후보별 이해득실을 떠나 민주당의 전체 파이가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자해적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호남은 민주당 전체 권리당원의 30%를 차지하고 출향인(出鄕人)까지 감안하면 절반에 육박한다. 호남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하면 대선 후보가 되기 어려운 구조다. 호남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후보가 민주당 최종 대선 후보가 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지역연고를 우선으로 다지고 영남 후보를 배척했다면 호남의 이러한 역사가 성립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때론 호남정서를 폄하하고 악용해도, 본선에서 이길 수 있는 후보를 선택했다. 보수정당의 집권을 막을 수 있는 본선 경쟁력을 최우선으로 삼는 전략적 선택이다. 2017년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반문정서’가 두텁던 호남에서 62%를 득표, 2위인 안희정 당시 충남지사를 3배 차이로 누르고 대세론을 확인했다. 호남에서 확실한 정권교체 주자를 선택한 결과다.

지역주의 망령을 부활시켜 영남후보론, 호남불가론, 호남후보론 따위로 호남의 전략적 선택을 기대하는 건 오산이다. 이재명이든, 이낙연이든, 정세균이든 호남의 선택을 받으려면 앙상한 지역주의 말고 본선에서 야당 후보를 너끈히 이길 수 있다는 경쟁력을 내보여야 한다. 앞서 호남의 아픈 상처를 헤집는 지역주의 관뚜껑을 다시 덮어야 하는 책임도 그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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