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은퇴자의 나눔과 연대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얼마 전 대학 마지막 학기를 앞둔 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대학원 진학과 취업을 두고 진로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꿈은 평범했습니다. 좀 잘 살고 싶다는 것, 보다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며 사회적인 영향력도 지니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와 사회적 영향력이라, 그걸 갖추면 잘 사는 것일까요?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제가 속한 공동체에 몇 년 전 기업에서 은퇴한 60대가 있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러 왔다가 제게 발목을 잡혀 풀과 나무를 가르치는 숲 해설가입니다. 그가 우연히 풀과 나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50대 초중반, 퇴직을 몇 해 앞둔 때였습니다. 나무 이름을 아는 것에서 출발했는데, 특유의 호기심과 열정으로 그만 이 세계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10여년이 지났으니 공부도 꽤 깊어졌지요.

그가 인문학 공동체에 온 것도 이 공부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전문 학자가 아닙니다. 뒤늦은 대학원 진학도 고려했으나 이를 옛 직업과 비슷한 것으로 만들고 싶진 않았습니다. 자신을 옥죄기보다 즐길 수 있는 일, 삶도 보살필 수 있는 일을 원했습니다. 그가 가르치는 것도 전문 학자와 아마추어의 틈새입니다. 풀과 나무를 공부하고 싶은데 대학이나 대학원에 가기는 어려운 이들이 주로 옵니다. 그는 강의에 열심이었습니다. 처음 서너 사람으로 시작한 강의가 머잖아 정원이 모두 찼습니다. 호기심과 열정도 전염되는 것인지, 그의 강의를 들은 이들의 상당수가 풀과 나무에 빠져들었습니다. 그의 강의를 요청하는 기관이나 단체도 늘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로서는 그에게, 강의보다 더 중요하게 기대는 것이 있습니다. 연대와 나눔과 접속의 연결점 역할입니다. 그는 공부하러 온 이들에게 식물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여러 소식을 나누고 다른 모임으로 연결합니다. 배우러 왔다가 그에게 등 떠밀려 가르치게 된 이들도 여럿입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공동체의 여러 공부 모임들을 응원하고 지원합니다. 그 덕분인지 그와 함께하는 이들은 연대와 나눔이 자연스러워지는 듯합니다. 그는 디지털에도 밝습니다. 코로나19로 온라인 수업이 불가피해졌을 때, 그가 정리해서 공동체 카페에 공유한 온라인 수업 방법 안내는 카페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강의 준비하고 강의하랴, 다른 모임 챙기랴, 글 쓰랴…. 수입은 예전에 못 미치지만 그는 회사 다닐 때 못지않게 바쁩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직장 다닐 때와 지금 중 어느 때가 더 좋으냐고요. 답은 간명했습니다. 지금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인문학은 문학, 역사, 철학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모든 것을 공부하는 학문입니다. 인간이 주제인 공부, 자유롭고 사람다운 삶을 제안하는 공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현대 과학기술의 발달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높였습니다. 그러나 가능성과는 별개로 우리의 삶은 그 반대쪽으로도 치닫고 있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두고 너나없이 추구하는 경제적인 풍요는 무한경쟁을 낳았고 능력 최우선주의는 승자 독식을 정당화하기도 했습니다. 기계화, 정보화가 진행될수록 인간의 기능화, 파편화, 계급적 분화 또한 격화되고 소외도 깊어졌습니다. 과학기술은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인간을 위한 기술이 아닌, 돈 혹은 이윤을 위한 기술로 전락했습니다.

공동체에서 만난 숲 해설가의 삶은 은퇴자뿐 아니라 이제 막 사회로 진출하는 이들에게도 시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공부를 향한 열정, 일을 놀이처럼 즐기는 것, 몸에 밴 나눔과 연대가 그렇습니다. 경제적인 가치 또한 중요하나 다른 것들을 압도하진 않습니다. 그가 지닌 사회적 영향력은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났지요. 물론 이런 그의 삶은 평생 직장생활을 한 은퇴자의 특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문학 공동체를 찾는 이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정말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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