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등에게 보내는 갈채

차준철 논설위원

2위 은메달보다 3위 동메달 수상자가 더 큰 행복감을 느낀다는 건 알려진 얘기다. 은메달 선수는 금메달리스트와 비교해 상심하고 동메달 선수는 4위와 비교해 안도하는 심리가 작용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일부 종목에선 결승전, 3·4위전 등 마지막 경기를 지고 끝내는 것과 이기고 끝내는 것이 성취감의 차이를 부른다고도 한다. 4위는 당연히, 좋을 게 없다. 누구보다 더 아깝고 분할 수 있다.

차준철 논설위원

차준철 논설위원

“난 솔직히, 준호가 맞는 것보다 4등 하는 게 더 무서워.” 엄마는 온몸에 피멍이 든 열두살 아이를 보고도 이렇게 말한다. 2015년 영화 <4등>의 한 장면이다. 수영대회에 나가 줄곧 4등만 하는 아이를 닦달하던 엄마. 특단의 조치로 왕년 국가대표 출신 코치를 새로 붙인다. 그런데 코치는 폭력과 체벌로 아이를 다그친다. 수영을 좋아하는 아이는 행복하게 운동을 계속할 수 있을까.

영화는 4등의 이미지를 각인한다. 시상대에 못 오르는 4등은 아무짝에도 쓸데없어 보인다. ‘등외’인 건 꼴찌나 다름없기도 하다. 그래서 무서운 4등이다. 영화는 이런 기성세대의 인식을 고발한다. 성적에 매달리고 순위에 집착하는 어른들의 그릇된 행태를 까발린다. 준호는 스스로 즐겁게 운동하면서 성적을 올린다.

요즘 도쿄 올림픽을 보다보니 한국의 4위가 참 많다. 그런데 예전처럼 기운 빠져 고개를 떨구고 절망하는 4위가 아니다. 후회 없이 만족하고 앞날을 기약하는 희망의 4위들이다. 한국 스포츠 역사를 새로 쓴 ‘4위 쾌거’로 칭찬받기까지 한다. 눈물로 얼룩졌던 4위 자리는 그대로인데 현장의 선수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팬들의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이다.

육상 높이뛰기에서 24년 만에 한국기록을 경신하며 2m35를 넘어 4위에 오른 우상혁(25)은 ‘쿨한 4위’의 아이콘이 됐다. 준비한 대로 도전해 꿈같은 성과를 냈고 더 높이 오를 가능성을 봤기에 “후회는 전혀 없다”고 했다. 또 “3년 뒤 파리 올림픽에선 강력한 금메달 후보가 돼 있을 것”이라며 “준비된 사람의 자신감은 자만이 아니란 걸 알았다”고 당당히 말했다. “할 수 있다, 올라간다, 투서리파이브(2m35)”를 주문처럼 쉴 새 없이 떠들고 땅을 치며 포효한 그는 최강의 ‘텐션’으로 올림픽을 즐긴 선수로 기억에 남았다.

우하람(23)은 다이빙 3m 스프링보드 예선 12위, 꼴찌로 결선에 올라 6차 시기 모두 맨 먼저 뛰면서도 최선의 연기를 펼쳤다. 결과는 4위. 한국 다이빙 역대 최고 성적이다. 그는 “4등 자체가 영광”이라며 “실력이 좋아지고 순위도 올라 기쁘다”고 말했다.

스포츠 팬들도 값진 4위를 알아주고 있다. 안타까운 목소리 대신 격려를 쏟아낸다. “메달 안 따도 좋으니 선수 본인이 만족하는 경기를 펼치라” “결선 진출 목표를 이룬 선수가 더 잘할 수 있게 칭찬합시다” 등의 응원 메시지가 이어지고 있다.

앞서 황선우(18)도 수영 자유형 100m 예선에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4위 성적으로 결선에 올라 세계의 이목을 받았다. 65년 만에 아시아 선수로 결승에 나서 5위를 차지한 그는 “만족한다. 행복하게 수영했다”는 말을 가장 많이 했다. 체조 마루운동의 류성현(19), 역도의 이선미(21), 사격 10m 공기권총 혼성 단체전의 남태윤(23)·권은지(19) 등도 이번 4위를 다음 대회의 발판으로 삼았다. 물론, 4위에 못 미쳤더라도 피땀과 눈물을 아낌없이 쏟아낸 모든 선수들이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4위들이 쿨할 수 있는 이유는 뭘까. 그들은 최선을 다해 공정하게 경쟁한 결과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인다. 간발의 차이, 사소한 실수 하나도 실력의 차이로 인정하고 순위 높은 상대 선수들을 존중한다. 무리하게 욕심내지 않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다. 심판 탓, 분위기 탓하며 억울해하지도 않는다.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과 경쟁하는 것에 온 힘을 쏟는다. 그러니 즐기고 만족할 수 있다. 팬들도 마찬가지다.

4위들에게 쿨하라고, 멋지라고 어른들이 가르쳐주지 않았다. MZ세대, 젊은 그들이 스스로 터득했다. 등수에 연연해 줄을 세우고, 과정보다 결과를 앞세우는 건 꼰대들의 사고방식임을 일깨워준다. 그들이 맘껏 즐기도록, 꼰대들은 아무것도 간섭 안 하는 게 낫겠다. 혹독한 경쟁으로 내몰며 결과만 강요해선 안 된다. 기성세대의 몫은 그들이 좋아하는 일을 마음 편히 하도록 성실히 응원하는 것이다. 4위를 ‘노 메달’로 부르지 말자. 4위는 4위대로, 5위는 5위대로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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