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정신, 그리고 성찰의 시간

“6411번 버스가 있습니다. 서울시 구로구 가로수 공원에서 출발해서 강남을 거쳐서 개포동 주공 2단지까지 2시간 정도 걸리는 노선버스입니다. 이 버스에 타시는 분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새벽 5시 반까지는 강남의 빌딩에 출근을 해야 하는 분들입니다. 다른 시간대에 이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 그 누구도 그 이른 새벽에 강남의 여러 정류장에서 내리는 이 50·60대 아주머니들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 아주머니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은 투명인간입니다.” 이 말의 주인공은 3년 전 고인이 된 인간 노회찬이다.

강수돌 전 고려대 교수·세종환경연합 난개발방지특위 위원장

강수돌 전 고려대 교수·세종환경연합 난개발방지특위 위원장

그렇다. 인간 노회찬은 약 10년 전 진보정의당 대표 수락연설에서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을 전면에 내세웠다. 빌딩을 청소하는 분들은 새벽 또는 밤늦게 일을 하기에, 잘 띄지 않는다. 정치란 모름지기 그런 분들의 존재와 애환을 읽어내고 이들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만드는 일임을 그는 잘 알았다. 그러기에 그는 이어 “강물은 아래로 흘러갈수록, 그 폭이 넓어진다고 합니다. 우리의 대중 정당은 달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 실현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요컨대 진보와 정의는 낮은 곳의 사람들을 받드는 일에서 시작된다. 보통사람들의 연대, 하방연대가 노회찬정신 1호다.

그러나 노회찬은 우리 눈에 화려하게 보이는 사람들 역시 제대로 꿰뚫어 보았다. 겉이 화려할수록 속은 텅 비기 쉽다. 대표적인 것이 ‘삼성 X파일 사건’이다. 2005년 8월, MBC 이상호 기자가 입수한 (1997년 대선 때) ‘삼성 X파일(불법정치자금) 및 안기부 불법도청’ 건을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이 전면 폭로한 것! 그는 삼성으로부터 ‘떡값’을 받은 정치 검사 7명의 실명도 전격 공개했다. 그 정치 검사들은 법무부 장차관 또는 서울지검장 출신들로, 권력의 핵심부였다. 물론, “한국 법은 만명에게만 평등”하다는 그의 비판처럼 돈을 준 자나 받은 자는 처벌되지 않고, 되레 진실을 알린 이상호 기자와 노 의원만 처벌됐다. 이런 식의 불의가 곧 대한민국의 사법정의(?)임을 동시에 폭로된 셈! 자신의 기득권까지 내던지며 강자들의 비리를 폭로한 용기, 이것이 노회찬정신 2호다.

또한 노회찬은 자기 양심을 속이지 못했다. 2017년 5월 촛불혁명의 결과 실시된 대선 이후 이른바 ‘드루킹 특검’의 수사가 진행되었는데, 그 불똥이 그에게도 튀었다. 여러 언론에서 노회찬의 ‘불법’(?) 정치자금이 언급됐다. 2018년 7월23일 어머니가 사는 아파트에서 투신하기 직전, 그는 가족에게 쓴 2통의 유서 외에 정의당 당원들에게도 메모를 남겼다.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경제적 공진화를 위한 모임)로부터 모두 4천만 원을 받았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 그는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며 자기 목숨을 던졌다. 부끄러움을 아는 그였다. 동시에 그는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부탁했다. 자신에 대한 정직함과 책임감, 이것이 노회찬정신 3호다.

오는 9월, <노회찬 6411>이라는 다큐 영화가 전국 각지에서 개봉된다. 여전히 수많은 ‘투명인간’은 피와 땀, 눈물을 흘리며 낮고 어둡고 험한 곳에서 노동하는 반면, 돈과 힘을 가진 강자들은 더 많은 걸 갖기 위해 불철주야 기를 쓴다. 내로남불 식의 표리부동, 아전인수, 후안무치가 판을 치는 이때, <노회찬 6411>을 계기로 우리 모두 ‘노회찬정신’을 실천하면 좋겠다.

노회찬이 이루고자 한 꿈은 ‘모든 시민이 악기 하나쯤 연주하는 세상’, 그리하여 더불어 행복한 세상이었다. 우리가 진정 더불어 사는 세상을 열려면 과연 선거제도는 어떻게 바꿔야 할지, 참된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지, 코로나19 사태와 기후위기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집단자살체제’를 극복할 방법이 무엇인지, 이런 걸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지금은 모두의 미래를 위한 ‘성찰의 시간’이다. 이제 우리는, 강자 앞에 당당했고 약자와 연대하며 자신에겐 너무나 정직했던 ‘노회찬정신’을 결코 외면하지 않고 정면 응시할 용기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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