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와 문화 전쟁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최근 발표된 한 자료로 우리 사회의 선 자리와 갈 길을 생각해보고 싶다. 지난 6월 국제여론조사기관 입소스와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정책연구소는 미국·독일·중국·일본 등 세계 28개국의 ‘문화 전쟁(culture war)’에 대한 조사를 공개했다. 그 나라들 가운데 우리나라 국민이 느끼는 문화 전쟁의 강도는 12개 항목 중 7개에서 1위를 기록했다. 빈부·정당·이념·종교·남녀·세대·학력 간 긴장이 그것들이었다. 이민과 인종 항목에서만 낮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문화 전쟁이란 1991년 미국 사회학자 제임스 헌터의 <문화 전쟁: 미국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투쟁>이란 책으로 알려진 말이다. 헌터는 이른바 ‘결정적 이슈들(hot buttons)’, 예컨대 낙태·정교 분리·프라이버시·동성애·총기 소지 등을 쟁점으로 미국 사회가 둘로 나뉘어져 있다고 분석했다.

이 문화 전쟁 개념은 1991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참여한 뷰캐넌이 사용해 유명해졌다. 2004년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당 에드워즈 부통령 후보가 ‘두 개의 미국’이란 용어를 사용해 문화 전쟁의 현실을 환기시켰다. ‘적색 주(red states·공화당을 지지하는 주)와 청색 주(blue states·민주당을 지지하는 주)’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그해의 단어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국식 문화 전쟁의 절정은 2020년 대선이었다. 주인공은 ‘트럼피즘’이었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노선을 지지하느냐, 거부하느냐를 놓고 미국 사회는 완전히 ‘두 개의 나라’로 쪼개진 것처럼 보였다.

나라마다 문화 전쟁이 다르게 나타나는 원인은 여럿이다. 불평등에 대한 경제·사회정책, 소수자에 대한 사회·문화적 포용, 승자독식이냐 합의주의냐의 정치제도 등의 차이가 문화 전쟁의 양상과 강도를 결정한다. 국가적 정체성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그 정체성을 자유민주주의로 볼 것인가,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한 일반 민주주의로 볼 것인가는 격렬한 논쟁을 야기하는 이슈다.

문화 전쟁을 비판만 할 순 없다. 이 개념에는 경쟁과 투쟁의 이중적 의미가 담겨 있다. 경쟁이 강조되면 사회발전의 역동성이 증가한다. 투쟁에 무게중심이 실리면 사회통합의 자원이 고갈된다. 후자의 경우를 증거하는 국가가 미국이다. 21세기에 들어와 미국에서는 정치·문화적 투쟁이 격화되고 합의를 위한 관용의 회랑이 협소해졌다. 트럼프식 포퓰리즘이냐, 전통적 민주주의냐는 최근 미국식 문화 전쟁의 중핵을 이룬다.

미국 등 서구사회와 우리나라 문화 전쟁의 양상은 같고도 다르다. 세 가지를 주목하고 싶다. 첫째, 우리 사회에서도 민주화 시대가 열린 이후 보수 대 진보 이념을 중심으로 문화 전쟁이 격렬히 진행돼 왔다. 이른바 제3지대가 여론조사 항목에는 존재하더라도 현실정치 영역에서는 대단히 협소하다. 더하여 강압 대 포용의 대북정책,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 대한 평가의 차이는 한국식 문화 전쟁의 특수성을 보여준다. 둘째, 21세기에 들어와 전통적 빈부 간 문화 전쟁에 새로운 세대 및 젠더 간 문화 전쟁이 중첩돼 왔다. 특히 청년세대의 정치·문화적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선 빈부·세대·젠더의 다차원적 프리즘을 분광시켜야 한다. 셋째, 이러한 문화 전쟁의 강도가 갈수록 증대하고 있다. 미국 사회처럼 우리 사회에서도 이제 관용과 공존과 타협의 지대는 점점 협소해지고 있다. 입소스와 킹스칼리지런던정책연구소의 자료는 이를 증거한다.

문화 전쟁 개념의 설득력은 ‘정체성의 정치’를 반영하는 데 있다. 21세기 탈진실의 시대에서는 객관적 사실보다 주관적 신념이 중요하고, 정치·문화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주관적 신념은 경제적 이익 못지않게 시민들의 사고와 행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정체성의 정치와 문화 전쟁을 고려할 때에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정치적 팬덤주의’를 제대로 독해할 수 있다.

내년 3월9일 대통령 선거로 나아가는 현재의 정치 국면은 문화 전쟁의 생생한 현장이다. 당내 경선의 예선에서는 지지 그룹에의 호소가 중요한 만큼 문화 전쟁이 예각화될 수밖에 없다. 11월 이후에 펼쳐질 본선에 가면 중도층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 문화 전쟁에 맞서는 사회통합과 국민통합이 강조될 가능성이 있다. ‘두 개의 나라’가 아닌 ‘하나의 대한민국’에 대한 활기찬 토론이 그때는 본격화될까. 그러하길 기다리는 한 사회학자의 소망을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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