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읽음

과거 독재 정권은 ‘체육관 선거’를 하고도 ‘투표했으니 민주주의다’라고 강변했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이들을 모아놓고 이들이 사회 각층의 지도층 인사니 시민을 더 잘 대표할 수 있다고 했다. 엄선된 시민들로 한번 걸러낸 민주적 절차는 ‘우중정치’가 되기 쉬운 민주주의의 보완물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궤변에 우리는 얼마나 분노했던가. 독재정권은 물러가고 민주정부가 들어섰지만 민중을 배제하고 엘리트 시민들에게 동의 없는 대표권을 할당하여 동원하는 방식은 더욱 교묘해졌다. 지금 탄소중립위원회를 보는 심정이 딱 그렇다.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탄소중립을 하겠다며 만든 탄소중립위원회는 최근 어이없게도 탄소중립을 안 하는 시나리오를 내놓았다. 시나리오는 3안 중 2개안이 탄소중립 포기안이다. 나머지 하나도 기존의 성장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기술적·시장적 탄소상쇄 방안이다. 이런 시나리오를 졸속으로 내놓고는 ‘탄소중립 시민회의’를 만들어 시민의견을 묻겠다고 한다. 그 시민회의가 1, 2, 3안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말고 토론하며 다른 안을 만들 수 있는가. 신고리 5, 6호기 공론조사 때와 똑같은 ‘수건돌리기’일 뿐이다. 정부는 탄소중립위라는 협의기구를 통해 독박 책임을 면하고, 탄중위는 시민회의에 의견을 묻는 형식을 취해 책임을 면제받는다.

신고리 5, 6호기 신규 원전 공사 중단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대통령이 되고 나니 공약 추진 대신 국민의 의견을 다시 묻겠다며 ‘공론화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정책 추진을 위한 태스크포스(TF) 같은 실무 전문가위원회였지만 ‘공론화’라는 이름을 붙이니 전혀 다른 민주적 대의기구처럼 보였다. 공론화위원회는 정부 사업 공모를 통해 조사업체를 선정하고, 조사업체가 국책사업 추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계획을 설계했다. 모집단 ‘국민’을 대표하는 500명의 조사 샘플을 ‘시민참여단’이라고 부르고 조사에 참여하는 이들에게 부과된 학습과 토의 시간을 ‘숙의 과정’으로 부르면서 공론형 여론조사는 ‘숙의민주주의’로 둔갑했다. 실상은 한번 묻고 끝나는 일회성 조사가 아니라 중간에 학습과 토론과정이 추가된, 조금 더 복잡한 여론조사였을 뿐이다. 참가자들에겐 개인적으로 좋은 경험이었을 수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남은 정치적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정부는 공론화위원회에 공을 넘겼고, 공론화위원회는 시민참여단에 공을 넘겼다. 핵발전소 2기를 멈춰 세우는 중대한 결정이 수건돌리기로 취소된 셈이다. 지금은 탄소중립이란 시급하고 중대한 과제를 그렇게 하고 있다. 수건돌리기는 어떤 결과가 나와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게 만드는 신기한 구조다. 더 기만적인 것은 이것을 계속 민주주의로 위장하는 것이다.

내용 없는 형식으로 민주주의를 껍데기로 만드는 일은 민주주의 운동이 분출될 때마다 그 힘을 제도 내로 흡수하거나 무력화하기 위해 지배층이 사용하는 민주주의 관리 방법 중 하나다. 1990년대 숙의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처음 나왔을 때도 그랬다. ‘투표만 하는 민주주의’를 넘어 ‘토론하는 민주주의’를 하자고 했을 때, 많은 연구자들이 상상한 것은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레시의 주민참여 예산제나 미국의 타운홀 미팅 같은 모델이었다. 한국의 향촌에 남아 있는 두레나 향약 같은 자치적 풀뿌리 민주주의에서 영감을 얻고 일상생활의 문제를 끊임없이 함께 토론하며 해결책을 찾아가는 ‘토론하는 민주주의’를 상상하고 모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현 가능한 현실의 전제 조건이다. 토론을 하려면 공론장이 필요했지만, 90년대 이후 공론장 변동은 부르주아 공론장은 제도 내로 흡수된 반면 민중 공론장은 대대적으로 파괴되고 해체당하는 양상으로 진행됐다. 정치참여는 시간과 자원을 요구하는데 노동강도는 높아지고 가계의 실질소득은 감소했으며, 경쟁은 심화되고 가족과 공동체의 해체는 가속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대화’란 것은 결국 노동자 민중의 사회적 권력을 분쇄한 자본-국가 동맹이 압도적 힘의 우위를 점한 후에 자신들이 만든 협의기구 내에서만 토론하자는 기만적 신사협정에 지나지 않았다. ‘토론하는 민주주의’는 ‘행동하는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수단이 됐다. 지금 탄소중립위원회와 시민회의는 바로 그런 목적에 충실히 복무한다. 게다가 탄소중립위원회는 처음부터 기후위기의 최전선에 있는 노동자 농민 등 당사자 주체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출범했다. 그 배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시민사회 몫의 입장권이다. 나는 묻고 싶다. 이 판을 바꾸지 않고 무엇을 바꿀 수 있는가? 전 세계가 불타고 있는데 성장의 동력을 바꾸는 연료전환을 목표라고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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