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그들의 애국심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른다는 최재형 전 감사원장 가족들의 국민의례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본 감상이다. 하지만 불편했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섬뜩했다. 국가주의 때문이다. 건국 후 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국가주의는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을 뒤덮었다. 유신체제에선 폭압으로 흘렀다.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처럼 애국가가 길 가던 시민들을 부동자세로 묶게 된 것도 그 국가주의의 외설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그 후 최 전 원장의 발언은 반대 방향으로 갔다. “국민의 삶을 국민이 책임져야지 왜 정부가 책임집니까?” 기이하기 짝이 없다. 그는 국민의 삶에 책임지지 않는 정부의 수장이 되려고 대권 주자에 나선 것인가. 논란이 일자 그는 “정부가 모든 국민의 삶을 책임진다는 건 전체주의로 가겠다는 것”이라며 맞섰다. 이번엔 엉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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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에 관한 최 전 원장의 인식도 야릇하다. 헌법가치를 가장 잘 지킨 대통령이 누구냐는 질문에 그가 답으로 내놓은 이는 이승만이었다. 초대 대통령으로서 쌓은 공적은 인정해야 하지만, 부정선거 책임으로 임기 중에 하야한 인물이 헌법가치를 가장 잘 지킨 것은 아닐 게다. 기자의 물음에 “준비되지 않았다”고 자주 답하더니, 노동문제엔 자신이 있었는지 “청년들의 일자리를 뺏는 최저임금 인상은 범죄와 다름없다”는 말도 했다. 이 발언 역시 정치적 언사임을 감안하더라도 노동문제에 대한 그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잘못 잡혀 있다는 느낌을 준다. 현행 헌법이 이미 30여년 전에 최저임금제 시행을 국가의 책무로 규정하였던 것을 그는 몰랐을까. 몰랐으면 딱한 일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위험하다.

노동문제라면 주 120시간 노동을 운위한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인식도 별반 다르지 않다. 게다가 재난지원금을 놓고 “세금 걷어서 일반적으로 나눠줄 거면 세금을 안 걷는 게 제일 좋지요”라고 한 말은 어떤가. 부동산보유세에 대해 “생필품을 갖고 있다고 세금을 때리면, 이 조세가 정의에 부합하고 공정하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발언까지 합쳐 볼 때, 혹시 그는 조세제도와 재정정책의 기본적 얼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본디 세금이란 걷어서 나눠 주는 것이다. 문제는 누구에게서 얼마나 걷고 어디에 얼마를 쓰는지다. ‘건강한’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말하거나 저출생 문제의 원인 중 하나로 페미니즘의 정치적 악용을 지목한 그는, 그런 인식의 출처를 “얼마 전에 무슨 글을 봤다”라고 밝혔다. “농업이 경자유전이란,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에 갇혀 있다”고 한 것은 또 누구의 무슨 주장을 듣고 한 발언이었을까. 심지어 어떤 이슈는 기본적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방사능 유출은 기본적으로 안 됐다”라고 한 게 그 예다. 실언 이후 논란이 일면 그때마다 해당 발언이 본의와 다르다는 식으로 변명하지만, 과연 그의 본의는 무엇일까.

대통령의 미래비전과 리더십은
암기가 아닌 상상·통찰력서 나와
정권교체를 진정으로 바라는가
그러면 정부 비난만 뇌지 말고
미래 국정 의제와 철학 제시하라

대통령 노릇을 해보겠다면, 시대정신에 기반을 둔 미래에 대한 비전과 통합이라는 기술로서의 정치력을 갖추어야 한다. 법률가 출신이 비전을 말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만 이들의 사고체계는 우선 미래지향적이지 않다. 더 큰 문제는 두 사람이 특정 분야를 넘어, 경제·사회·외교 등 국정의 여러 면에 접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고 또 정치 현장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훈련을 쌓아본 일이 없다는 점이다. 시험 점수와 권력자의 낙점으로 그럴듯한 자리에 오르는 일과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하며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더욱이 나라의 앞날에 대한 비전은 어느 날 몇 권의 책을 읽고 몇 사람 전문가를 과외선생으로 모셔서 속성으로 갖출 수 있는 게 아니다. 비전은 암기가 아니라 상상력과 통찰력에서 나온다. 지금까지의 발언으로 보아 이젠 상투어처럼 들리는 “공정과 상식”이나,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대한민국을 위하여 나를 던질 것” 따위의 말로 국정 철학을 대신할 수는 없다.

제왕학(帝王學)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교육체계다. 그런데도 그것이 ‘학’이라는 꼬리를 달고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국정 최고책임자의 식견과 리더십이 막중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미담도 아니고 우스꽝스럽거나 감동 없는 홍보영상도 아니다. 겸손으로 포장한 무지나 겸손하지조차 않은 무지도 물론 아니다. 정권 교체를 진정으로 바라는가?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난만 뇌지 말고, 이 나라의 미래를 어떻게 꾸려갈지 국정 의제와 그에 대한 철학을 제시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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