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

신예슬 음악평론가

“이 이야기는 머릿속으로 음악을 듣던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여성들이 머릿속으로 음악을 들어야만 했던 이유를 생각해본다. 머릿속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서. 그 음악을 표현할 도구를 손에 쥐지 못해서. 혹은 그 음악을 사회가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서. 아니면 그 머릿속에 있는 음악을 꺼내 들으면 훨씬 더 근사하다는 사실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일렉트로니카 퀸즈-전자음악의 여성 선구자들>(Sisters with Transistors)은 최근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돼 음악인과 애호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 다큐멘터리다. 많은 이들이 잊곤 하지만, 전자음악 초창기에는 영미권과 유럽 대륙에서 활약한 여성들이 있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들의 이름과 활동을 하나하나 조명한다. 클라라 락모어, 다프네 오람, 베베 바론, 폴린 올리베로스, 델리아 더비셔, 매리앤 아마처, 엘리안 라디그, 수잔 치아니, 로리 스피겔까지. 주로 2차대전 무렵부터 1980년대까지 이야기다.

신예슬 음악평론가

신예슬 음악평론가

양차대전 이후,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르게 노래하고 음악했다. 지난 세계가 끝났다는 것을 모두들 직감한 것처럼 음악 분야에서는 제각각의 질서를 지닌 음악이 탄생했다. 대중음악과 록음악의 대대적인 확장 외에도 크고 작은 혁신들이 있었다. 무언가 결정된 상태에 반대하는 우연성 음악, 최소한의 상태를 탐구했던 미니멀리즘, 그리고 전자적으로 음악을 만드는 ‘전자음악’이 있었다. 음악가들이 옛 음악의 질서를 뒤엎는 방식은 달랐지만 특별히 전자음악의 태동은 가장 전면적인 변화 중 하나였다. 그 이면엔 새로운 소리로부터 필연적으로 비롯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질서와 힘에 대한 갈망이 있는 듯했다. 이제 막 탐험되기 시작한 전자음악이라는 미지의 땅은 모두에게 생경한 영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은 그간 서구 음악문화에 쉽게 참여할 수 없던 이들, 즉 여성들에게도 활짝 열려 있는 공간이었다. 게다가 전자음악에는 강력한 장점이 있었다. 여기서는 악보를 볼 필요가 없었고, 화성학이나 대위법 등 아카데미에서 중시됐던 이론을 배우지 않아도 됐다. 음악적으로 오랜 시간 훈련된 몸이 없어도 원하는 소리를 생성해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전자악기의 소리는 ‘도시의 소리’가 촉발한 음악적 환상을 실현하는 데도 더욱 적합했다.

제각각의 실험이 이루어지던 이곳에서 남성 음악가와 아카데미 중심적이던 서구 음악계의 질서는 꽤 좋은 방향으로 흐트러졌다. 전자음악계에서 이 여성 음악가들은 대체 불가능한 빛나는 성취들을 만들어냈다. 엘리안 라디그의 길고 깊은 음악은 청취자에게 근사한 몰입을 선사했고, 멋지면서도 수상하기 그지없었던 델리아 더비셔의 ‘닥터 후’ 테마음악은 사람들의 뇌리에 수수께끼 같은 음향을 각인했다. 다프네 오람이 만든 우아하고 힘 있는 리듬은 먼 훗날 만들어진 ‘EDM’(일렉트로닉 댄스 뮤직)의 기저에도 배어들었다. 다큐멘터리에서 이들의 음악을 들으며 그들의 거대한 존재감을 체감해본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이 없었다면 어땠을지를 나란히 떠올려본다. 어쩌면 지금보다 덜 흥미진진한 소리를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남는다.

다큐멘터리의 한 부분에서는, 전자음악은 이전의 음악적 재료들을 다루는 게 아니라 ‘힘’을 다루는 것이었다는 내레이션이 들려온다. 도시를 운영하는 힘과 같은 힘으로 음악을 만든다는 감각은 자신의 도구를 손에 쥐지 못했던 여성들에게 거대한 자유와 힘을 선사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다큐멘터리는 지금 내 곁의 자매들이 만든 음악을 들여다보게 하는 또 다른 힘을 건넨다. 그들이 상상하고 꿈꿔온 음악은 우리의 소리세계를 어떻게 바꿨는지, 전자음악이 내 곁의 여성들에게 선사한 힘은 무엇이었을지, 조금 더 소상히 질문해보려 한다. 선구자들이 걸어온 길을 바라보며, 수많은 자매들의 음악을 하나둘씩 되뇌어본다.


Today`s HOT
러시아 미사일 공격에 연기 내뿜는 우크라 아파트 인도 44일 총선 시작 주유엔 대사와 회담하는 기시다 총리 뼈대만 남은 덴마크 옛 증권거래소
수상 생존 훈련하는 대만 공군 장병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불법 집회
폭우로 침수된 두바이 거리 인도네시아 루앙 화산 폭발
인도 라마 나바미 축제 한화 류현진 100승 도전 전통 의상 입은 야지디 소녀들 시드니 쇼핑몰에 붙어있는 검은 리본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