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풀꽃 시계는 언제나 5시10분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토끼풀은 장미목 콩과에 속하는 식물이다. 예부터 반지와 시계는 어른임을 나타내는 귀한 물건이었고, 여름이면 지천에 피는 토끼풀꽃은 어린이가 잠깐이라도 어른이 되고 싶을 때 쓸모가 있었다. 통통한 토끼풀꽃을 엮어서 시계를 만들고 손목에 차면 제법 근사해보였던 것이다. 1979년에 발표된 오정희의 소설 ‘비어 있는 들’에는 토끼풀꽃 시계를 차고 노는 아이에게 엄마가 시간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몇 시예요?”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김지은 서울예대 문예학부 교수 아동문학평론가

아이는 손목을 들여다보면서 자신 있게 “다섯 시 십 분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몇 번을 물어봐도 똑같이 말한다. 다섯 시 십 분은 아이에게 어떤 시간일까. “만사 제쳐 두고 텔레비전 앞에 매달리는 초능력의 로봇 만화영화가 시작되는 시간”이다. 아이의 토끼풀꽃 시계 속 시간은 언제나 다섯 시 십 분이다.

어른에게는 24시간이 자신의 것이지만 어린이는 그렇지 않다. 늦기 전에 잠자리에 들어야 하고 정해진 시간 안에 밥을 먹지 않으면 늑장을 부린다고 혼난다. 어른들은 어린이가 몹시 중요한 일에 몰두하는데도 불러대면서 애들이 뭐가 바쁘냐고 한다. 필리파 피어스는 그런 어린이의 마음을 읽은 작가다. 동화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를 통해 어린이의 시간을 길게 늘여놓은 뒤 그들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준다. 홍역의 유행을 피해 이모 집에 온 톰은 새벽 한 시가 되면 그 집의 괘종시계가 열세 번 울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묘한 시간 안에는 미지의 공간이 숨어 있었고 밤마다 모험이 시작된다. 어린이들은 이 작품을 읽으며 아무리 오래 머물러도 현실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꿈같은 자유를 경험한다. 밤이니 잠이나 자라는 잔소리 따위는 없는 환상의 정원에서 마음껏 논다.

어린이의 속도를 배려하고 어린이의 시간을 지켜주는 것은 중요하다. 예를 들어 공동체는 어린이가 자신만의 시간이라고 느끼는 놀이시간을 존중하고 놀이터를 마련해 공간을 보장하고 있다. 또한 유치원이나 학교 앞 횡단보도는 어린이의 걷기 속도를 고려해서 신호 길이를 길게 준다. 일반도로에서 24m 횡단보도의 초록불은 31초지만 어린이 보호구역의 초록불은 37초로, 6초가 더 길다. 어린이를 위한 시공간이 얼마나 잘 준비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해당 시민사회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어린이가 머무르는 가상의 시공간인 미디어는 어떨까. 공영방송들은 전통적인 어린이 프로그램 시간대를 부분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토끼풀꽃 시계를 보며 ‘다섯 시 십 분’을 기다리는 어린이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기 때문이다. <TV유치원>과 <딩동댕 유치원>은 1980년대부터 이어져온, 대표적인 어린이의 시간이다. 어린이들은 미디어 안에 자신들을 위한 시간이 있다는 것에 환호하며 익숙한 캐릭터나 로고만 보여도 즐거워한다.

EBS의 유튜브 프로그램 ‘딩동댕 대학교’는 어린이 프로그램 <딩동댕 유치원>의 캐릭터와 포맷을 그대로 가져온 성인 예능이다. 친숙한 인형들이 둘러앉아 성인의 고민을 상담한다. 어린이들은 ‘딩동댕’이라는 검색어를 사용하다 자연스럽게 이 프로그램과 마주친다. 성 상담 등을 다루는 회차에는 시청 제한이 걸려 있으나 ‘틀니 길만 걸으면 안 되니까’ 같은 에피소드는 어린이도 시청할 수 있다. 걸러지지 않은 거친 표현이 등장하는데도 어린이들은 이 프로그램을 자신들의 시간으로 인지할 가능성이 높다. 알고리즘에 의해 움직이는 환경에서 어린이가 사랑하는 포맷을 사용하며 어린이를 위해 만든 게 아니니 어떤 내용을 담아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건 공영방송으로서 무책임한 태도다. 어렵게 지켜온 어린이의 시간을 굳이 빼앗아 가지겠다는 자칭 ‘어른이’의 욕심은 어디까질까. 화자의 어법과 표현, 태도 모두 어린이의 것을 가져가 어른 프로그램이라고 주장하지 말고 어른의 예능은 어른의 상상력으로 새롭게 만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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