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정재왈 예술경영가 고양문화재단 대표

일찍이 예술과 기술의 관계를 예리하게 분석한 선구자는 발터 베냐민이다. 그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이라는 글에서 기술 발달에 따른 예술의 본질적인 변화, 즉 아우라의 붕괴를 언급했다. 아우라는 예술 원작이 갖는 ‘신비한 분위기’이자 고유한 특성을 일컫는 말이다.

정재왈 예술경영가 고양문화재단 대표

정재왈 예술경영가 고양문화재단 대표

잃으면 얻는 것도 있는 게 세상의 이치이다. 아우라를 상실한 예술은 대신 대중성을 확보했다. 베냐민은 사진과 영화를 그 예로 꼽는다. 사진기술의 발달은 기존 회화예술의 아우라를 붕괴시키지만, 사진이라는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었다. 영상기술의 획기적인 발달에 힘입어 영화는 대중예술의 총아로 등장했다.

무엇이 이와 같은 예술의 확장과 변화를 가능하게 했을까. 키워드는 ‘복제기술’이다. 사진과 영화로 보듯이, 원작(원본)과 똑같은 작품을 여럿 혹은 대량으로 만들 수 있게 돼 시간과 장소의 경계가 무너졌다. 여파로 예술의 본질인 ‘진본성’과 ‘희소성’은 약해졌으나 경계는 훨씬 넓어졌다. 이런 변화를 베냐민은 ‘예술의 민주화’ 과정으로 풀이했다.

세월을 초월하는 탁견은 늘 새로운 영감을 준다. 베냐민이 설파한 복제기술과 예술의 관계가 요즘처럼 와닿은 때도 없는 것 같다. 원동력은 두 가지에서 비롯된다. 인터넷 기반 온라인과 사이버 기술 발달 등이 내부 요인이라면, 면대면 예술 활동을 어렵게 만든 팬데믹 상황은 이 변화를 가속화하는 외부 요인이다. 그 중심에 복제기술이 있다. 활용 방식에 따라 희비가 갈리는 현상을 보자.

첫째, 복제를 무력화하는 경우다. 복제 자체를 차단하여 예술의 유일성을 보전하면서 가치를 높이는 활동이다. 복제가 수월한 시대의 역반응이다. 일명 ‘디지털 정품 보증서’로 불리는 NFT가 여기에 속한다. NFT는 ‘대체 불가능한 토큰’이라는 뜻으로,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누가 디지털 자산의 소유자인가를 증명하는 기술이다. 복제는 불가능하다. 미술계가 즉각 반응했다. 얼마 전 간송미술관은 국보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NFT로 제작, 판매하며 열풍의 진원지가 됐다. NFT로 만든 훈민정음 해례본 100개는 원본과 동일하지만 대신 희소성은 줄었다.

둘째, 복제를 무한대로 확장하는 경우다. 기술 발달을 적극 수용하고 응용하여 없던 예술세계도 창조한다. 인터넷을 통해 동영상을 서비스하는 OTT는 새로운 공연 유통의 상식이 됐다. 창작과는 별개지만 시장을 넓히는 면에서 의미 있는 변화다. 유튜브 등 다양한 복제기술 전달 플랫폼의 발달 덕이다. 이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신세계를 만들기도 한다. 가상세상을 뜻하는 메타버스(Metaverse)의 세계다. 가상과 증강현실 등을 망라한 메타버스의 확장현실(XR)은 현실 밖에서 없던 우주를 구현한다. 가상공간에 아바타를 내세운 K팝 공연이나 드로잉 퍼포먼스는 이런 식의 적용 사례이다.

셋째, 복제에 적응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대체로 순수 공연예술 분야가 여기에 해당한다. 음악, 특히 클래식은 오래전부터 녹음과 영상을 통해 기술복제의 수혜를 받은 장르다. 우리는 다양한 재생 방식을 통해 저장된 음악을 수시로 접할 수 있다. 옛것이나 지금 것이나 상관없이, 현장 실황과 별 차이 없는 아우라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한데 연극과 무용 등은 어떤 복제기술로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예술의 존재 가치 자체가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는 예술의 미래 모습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장르의 특성과 기술력에서 비롯된 ‘복제격차’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어떤 장르는 퇴보할 수도 있고, 더 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새로운 예술의 탄생도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상상이다. 한 세기 이전, 복제기술을 등에 업고 사진과 영화 예술이 대중 속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처럼 말이다.

사실은 연극이 가장 걱정이다. 역사가 오랜 ‘모든 장르의 어머니’라고는 하지만, 도무지 복제기술이 먹힐 것 같지 않아서다. 공연 현장의 아우라야말로 ‘대체불가토큰’이다. 그러니 답은 뻔하지만 자명하다. 어떤 세상이 와도 더 치열하게 현장에서 버티고 살아남아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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