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바깥에서 추석 놀기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2005년 동성애 정체성을 가족들에게 커밍아웃하면서 겪었던 관계 단절로 인한 명절 우울감이 이번 추석 훨씬 전부터 떠오른 것은, 올해 초 다른 계기로 내 쪽에서 원가족과의 관계 단절을 결정하여 알린 때문인가 보다. 가족중심주의를 많은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 중 하나로 여기며 가족과의 거리 두기를 생의 과제로 삼고 살지만, 그럼에도 가족 단절은 특히 명절이면 한바탕의 우울감에 붙들리게 한다. 징그럽게 공고한 가족이데올로기가 남긴 내 속 흉터라 여겨 수긍하면서, 우울감에 푹 빠져버리지 않을 징검다리 두 개를 미리 잡아놓았다. 가족 바깥에서 추석을 지내게 되는 사람들과 즐거운 자리를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추석연휴 남성 성소수자 두 명과 함께 소위 ‘노땅 성소수자’의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함께했다. 가서 보니 한 명은 초면이었고, 다른 한 명은 전에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자리를 주선한 두 여성과도 나로서는 첫 만남이었다. 그럼에도 남다른 정체성이라는 공통점과 다양한 차이들 덕도 있고, 첫 만남이지만 마음을 열기로 작정한 터라 흥미롭고 진지하며 유익했다. 두 분은 주변 비성소수자들에게 커밍아웃을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내가 각별하게 느낀 점 하나는 아직 성소수자 혐오가 사회문제가 되지 않던 시대에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알기 시작하고 그런 자신을 수긍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 다 내적 갈등과 자괴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일반화할 것은 아니지만, ‘커밍아웃하지 않음’이라는 나름의 전략을 고수한 때문이기도 하다. 다양한 소수자에 대한 혐오나 배타는, 정체성과 목소리로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부터 작동한다.

성소수자들이 성(별)정체성으로 가족 바깥에 놓이는 경우라면, 홈리스들의 가족 단절 원인은 대체로 빈곤이다. 명절연휴가 시작된 지난주 토요일에는 홈리스들과 함께하는 추석맞이 놀이에 참여했다. 60여명의 주변 홈리스들과 지인들이 나눌 따듯하고 소박한 명절음식을 여럿이 모여 만들며, 수다와 솜씨와 노래와 잔소리로 복작복작 하루를 즐겼다. 시민들이 십시일반한 돈으로 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어 각종 전과 잡채와 돼지갈비를 함께 만들고, 과일과 송편도 나누었다. 누구는 먹기만 해봤지 동그랑땡은 처음 만들어본다며 칠십 평생 먹은 동그랑땡을 만든 손길들에 고마워했다. 한쪽에서는 언니들이 노래와 술로 한바탕 놀다 말고 코로나고 뭐고 아예 화투판을 벌이자고 우겼다. 나에게는 눈길 한 번 안 주던 한 분이 웬일인가 싶게 자꾸 내 근처를 오가더니만, 며칠 전 공공임대아파트에 당첨되었다는 이야기로 바쁜 나를 붙들고 말을 한없이 이었다. 그의 웃음을 처음 보았다. 아랫마을 마당에는 평소 자주 보지 못하던 노숙인들도 여럿 모였다. 한 아저씨는 몸짓과 표정을 섞어가며 일인극에 열을 올렸다. 홍고추를 다듬으며 몰래 들어보니, 대강 빈곤과 대선 후보 그 비슷한 주제로 열변을 토하다 말고 마당에서 재잘대는 새소리에 주제를 틀어 어느 수녀원과 절에 살았다는 새 이야기로 건너뛰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누구도 길게 관심을 주지도 말리지도 않았다. 서울역 노숙인 광장에서 음식 부스러기로 비둘기와 개와 고양이와 쥐를 키운다는 그는, 갈비 구울 곳이 없다며 아예 익혀 달라고 했단다. 부엌 입구에 써 붙인 ‘평등명절’의 ‘평’ 자가 살짝 삐뚤어져 있어 편했다. 아 참, 집에 와서 펼쳐보니 내 음식 꾸러미에 잡채가 빠졌더라!

모든 ‘비정상’에는 우울과 분노, 도발과 저항이 뒤엉킨다. 삿대를 단단히 쥐고 마음과 삶의 향방을 최대한 주도할 일이다. 불온함과 변태(變態)야말로, 돈과 가족이 최고라는 세상의 끝에서 재난을 즐겁게 통과하고 다음 재난을 맞이할 힘을 키우는 잉여들의 ‘가오’다. 먼저 추락한 사람들 덕에 더 추락해도 살아지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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