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헤이즐넛 커피가 ‘개암 커피’다

엄민용 기자

추분(秋分)이 지났다. 이제 낮보다 밤이 점점 길어지며 계절은 겨울로 향한다. 농부들은 이즈음 논밭의 곡식을 거둬들인다. 고추를 따 말리고, 호박고지와 박고지를 만드는 것도 이때의 일이다. 겨울 제철음식인 묵나물에 들어갈 산채를 말리기도 한다.

묵은 메밀과 녹두 따위의 앙금을 되게 쒀 굳히기도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묵의 재료 중 으뜸은 ‘도토리’다. 도토리는 원래 떡갈나무의 열매로, 생김새는 약간 길쭉한 타원형이다. 이보다 좀 크면서 원형에 가까운 것이 ‘상수리’다. 상수리는 말 그대로 상수리나무의 열매다. 상수리나무는 높이가 20~25m나 되지만, 떡갈나무는 10m 정도로 좀 작다.

이렇듯 도토리와 상수리는 열리는 나무가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다. 예전에는 당연히 이를 구분해 불렀다. 하지만 모든 것이 풍족해지면서 이들이 우리 밥상에서 멀어져 갔고, 요즘 젊은이들은 이를 잘 모른다. 그런 까닭에 지금의 국어사전들도 이를 애써 구분하지 않는다. 이제는 상수리를 도토리로 불러도 된다.

도토리와 상수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도 ‘도토리 키재기’라는 표현은 안다. “정도가 고만고만한 사람끼리 서로 다툼”을 이르는 말로, 도토리묵만큼 친숙한 표현이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말을 일본 속담으로 본다. 그렇다고 해서 ‘도토리 키재기’를 쓸 수 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속담에 국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토리 키재기’는 이미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올라 있다.

‘산에 사는 멧돼지(돝)가 먹는 밤’이라는 의미를 가진 도토리가 익을 때면 ‘깨금’도 여문다. 전래동화 ‘혹부리 영감’에서 도깨비들을 놀라게 한 그 열매다. 하지만 ‘깨금’은 사투리다. 모양은 도토리 비슷하고 맛은 밤 맛과 비슷하지만 더 고소한 이 열매의 바른말은 ‘개암’이다. ‘개암’이 영어의 헤이즐넛(hazelnut)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헤이즐넛 커피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개암은 모른다고 한다. 일본 속담 ‘도토리 키재기’가 우리 국어에 뿌리를 내린 것보다 헤이즐넛은 알면서 개암은 모르는 실태가 더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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